주님께서는 비유를 드시면서 간혹 대비법을 사용하십니다.
악한 애비도 자기 자식에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느님은.....
매정한 사람도 끈질긴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느님....
오늘도 과부가 끈질기게 청하면 비록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운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실 리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불의한 인간은 들어줄 마음에 없어도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지만
인간의 청을 귀찮아하실 리 없으신 의로운 하느님은
당신의 의로움 때문에 의로운 청이라면 그 청을 들어주실 거라는 거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마지막 말씀이 정말 그런지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정말 지체 없이 들어주십니까?
언제고 꼭 들어주신다는 말은 수긍이 가지만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상 좀체 수긍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체 없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체 없이>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제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축일이었지요.
주례 형제가 강론을 할 때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우리를 비교하며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때 조금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는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성녀 엘리사벳은 진정 기꺼이 주었고 아낌없이 주었음을 얘기하였지요.
제 생각에 우리의 <지체 없이>는 시간적인 지체 없음인데 비해
하느님의 <지체 없음>은 마음의 지체 없음과 사랑의 지체 없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면 당신 차원에서는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들어주시는 것을 지체하신다면 우리 차원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지금 그 이유가 뭘까 1시간 이상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데도 그 이유가 뭔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궁색하지만 몇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는 더 좋은 목적을 위해서 판결을 지체하실 거라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 때문에 시련을 통해 단련을 하시려는 경우이지요.
딱 맞는 예는 아니지만 형제들 간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아버지로서 판결을 해줘야 하는데 분명 작은 아들이 옳고
그런데도 실제로는 형에 의해 잘못한 거로 몰려 억울합니다.
이 경우 바로 형이 잘못했고 동생이 옳다고 판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지만 인내하는 사랑을 키우기 위해 미룰 수 있지요.
우리가 자주 참을성을 키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참을성을 키우고 억울함을 참을 줄 아는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이것이 억울한 개인을 위한 이유라면 다른 이유는 공동체적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 때는 즉시 바른 판결을 하실 테지만
사람의 판결을 통해 판결을 하시는 이 세상에서의 심판에서는
공동체의 심판의 때를 하느님도 기다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를 위한 판결,
백남기 농민을 위한 판결을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십니다.
권력자들이 잘못했고 잘못을 숨기기 위해 옳은 판결을 방해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억울했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며
일부는 올바른 판결을 하려고 했지만 일부가 아니라 다수가 될 때까지는
권력을 이길 수 없었고 그래서 올바른 판결도 미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마어마한 불의가 드러나고 촛불시위가 일어나자
올바른 판결이 드디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얘기가 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공동체가 의로운 판결을 원할 때까지 당신의 의로운 판결을 지체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