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오늘 주님께서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예루살렘이 알았더라면
좋을 텐데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음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반대로 그러면 <불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또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먼저 불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고집 또는 주장
비판 또는 비난
욕심 또는 교만 등 우리 안의 많은 것들이 불화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그렇긴 하지만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원인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고집을 부려도 내가 똑같이 고집을 부리지 않거나
고집을 부리는 것에 대해 내가 시비를 걸지 않으면 불화가 없지요.
비판을 하더라도 시비지심이 없이 진정 사랑으로 비판을 하거나
비판을 받더라도 시비지심 없이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불화가 없지요.
그러므로 양쪽 다 시비지심이 없으면 불화는 생기지 않고
어느 한쪽이 시비지심이 있거나 양쪽 다 시비지심이 있을 때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 <옳다 그르다> 또는 <맞다 틀리다>만 있을 때
시비를 가리게 되고 거기에 악감정까지 실리면 감정싸움이 되어
다투게 되고 불화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시비를 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비를 거는 그 마음, 곧
시비지심이 문제이며 시비지심의 원인인 사랑 없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자신도 자유롭게 하고 사랑하는 그도 자유롭게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를 요구치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이기를 바라고
그러기에 그가 어떠하든 시비를 걸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이렇게 개인적인 평화 없음에 대해서가 아니지요.
곧 전쟁이 일어나 폐허가 될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겁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 오셨다면 판문점이나 군사분계선 앞에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게 뭔지 모르는 한반도를 보고 우시는 것과 같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 한반도를 보고도 우십니다.
관계되는 나라들이 평화 공존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멎은 지 64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휴전협정 상태입니다.
그런데 누가 평화를 원하지 않습니까?
왜 평화를 원하지 않습니까?
호전세력이 원하지 않는 것인데 누가 호전세력입니까?
전쟁을 통해 피해는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세력이지요.
누가 전쟁이 나도 피해보지 않고 이익만 보게 되나요?
전쟁을 통해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이들.
군수업지를 비롯하여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장사꾼들.
제가 강정마을에 갔을 때 알게 된 것은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정마을과 제주를 군사기지화 하는 것에는
미국과 우리나라 해군과 퇴역해군들과 건설 회사들이 얽혀 있었고,
제주 사람 중에도 군사기지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었지요.
주님, 저희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리고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