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주 경험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내가 저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자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성전정화를 하신 예수님을 없애버렸지요.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성전에서 없어져야 할 자들이 성전에 계셔야 주님을 없애려는 것이고
성전에서 주님을 뵈어야 할 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몰아내는 거니 말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몇 번 이 점을 꼬집으셨지요.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받으려고 주인이 종들을 보내자 때려죽이고
아들을 보내자 아들까지 때려죽였다는 비유를 들어 주시면서
아버지께서 예언자들과 당신을 보내셔도 하늘과 땅의 주권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차지하려 한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성전의 주인을 성전에서 몰아내려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자기가 성전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전도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안 계시고 장사꾼, 사기꾼, 권력가들만 있는 성전이
무슨 성전입니까? 결코 성전일 수 없지요.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성전을 내 것으로 차지하려는 사람 말입니다.
헌데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제가 그런 사람인 것 틀림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러느냐고요?
우선 제가 주장질을 하고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려고 하면서 그럽니다.
이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성전이어야 하는데
우리 공동체에 하느님이 안 계신 듯 주장질하는 것이 바로 그 것이지요.
또 저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로서는 어떻게 그러느냐고요?
성전에서 조배는 하지 않고 성당까지 커피를 들고 들어와 담소를 하면서,
본당에서 하느님의 일을 계획하면서 기도는 하지 않고 머리를 맞대면서,
수도원에서 관상적으로 소통하기보다 심리학적으로 소통하려 하면서.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밀어내는 경우 말입니다.
그들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우리 공동체의 예언자일 수 있는데
나나 우리가 듣기 불편한 얘기를 한다고 해서 듣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공동체적으로 소외시킬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일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몸이 주님의 성전이고,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의식치 않고 욕망대로 몸을 굴리거나
기도할 수 있는데 근심이나 걱정을 하면 그것도 성전을 더럽히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