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어제 오늘 저는 수련자 강의 차 수련소에 와 있습니다.
서원 형제들 모두 공동 피정에 가는 관계로 제가 미사를 주례하기 되어
새벽 눈길을 달려 가까스로 미사 시간에 맞춰 들어갔는데
제대 앞에 돌아가신 박영선 프란치스코 형제님의 영정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인연이 깊었던 분들 중 백 수사님은 제 영명 축일에 돌아가셨고
박영선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제 영명 축일에 발인을 하였지요.
이분들은 저의 인연들이셨는데 돌아가신 지가 벌써 14년, 10년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저는 기도 때마다 영정을 보며 저와 그분의 인연을 떠올리고,
무엇보다도 저에게 좋게 영향을 미쳤던 그분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추억과 감상에 젖었는데 문득 묵상 중에
‘나의 인연?’, ‘나와의 인연이라고?’
아니지 ‘하느님의 인연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나의 인연들이라는 것이 실은
하느님이 맺어주시고 하느님이 끝내시는 인연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나의 인연이라면 그 인연을 내가 좌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다 하느님께서 좌우하시잖습니까?
비슷한 연대에 태어나게 하느님께서 하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우리가 만나고,
같은 수도자의 꿈을 꾸게 하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우리가 만나며,
수도자를 각기 꿈꿨더라도 우리 수도원으로 불러주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옥천 사람과 수원 사람이 같이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인연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동안만 유지할 수 있고
그 시간이 끝나면 인연도 끝이 나야 하며
오늘 주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 부활하더라도 그 인연들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한 뒤에는 더 이상 부부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고,
무엇보다도 나의 부모와 자녀들과의 인연이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죽고 나면 더 이상 나의 부모는 부모였던 분이지 부모가 아니고,
나의 자녀들도 자녀였던 존재지 자녀가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언젠가 강의 중에 고약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죽고 나면 이제 부부의 인연은 끝나는데 그래도 좋겠냐고 물으니
거의 대부분 괜찮다고 하고 어떤 분은 적극적으로 좋다고 하였지요.
이어서 그러면 지금의 아들이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니
그것은 대부분이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들의 부모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모가 되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지금의 아들의 부모가 또 되겠다는 것이지요.
부활이란 생명만 죽었다가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까지 죽는 것이고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연은 다 죽고 하느님 중심의 인연으로 재편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은 죽고 난 뒤에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산다면
우리의 모두 관계는 하느님 중심의 관계이어야겠지요.
이것을 묵상케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