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가 노숙자를 봅니다.
며칠 씻지 않아서 머리는 지저분하고
한동안 먹지 못해서 얼굴이 야위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예수님이라면
그를 만났을 때 우리의 행동은 어떠할까요?
다가가서 당장 씻게 해 주고
식사를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숙자를 보고 그러게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우리는 노숙자에게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면서,
예수님께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과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똑같이 이야기 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며,
그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노숙자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바로 미사를 바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노숙자를 만난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의문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내가 한 착한 일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칭찬해 주거나
더 나아가 내가 한 것에 대해서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숙자라는 존재는,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것을 보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도움이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할지도 모릅니다.
한 없이 도와줘도 그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노력은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헛수고가 아닙니다.
내가 도와 준 사람이 직접 나에게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내가 가진 것,
그것이 물건이든 시간이든,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하느님께 받았고,
그래서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을 그들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데,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 없다보니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는 방식으로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부분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에,
나에게 남는 것,
더 나아가 지금 당장 나에게 꼭 필요한 것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눔은 쉽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이를 도와 주는 것,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부터 시작하면
우리는 얼마가지 못해서
그 나눔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내가 지금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한다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나눔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임금임을 고백합니다.
그 임금은 우리를 사랑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들도 우리 임금님이 세우신 나라에 함께 머물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우리의 작은 나눔은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점점 더 커지게 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더 크게 느끼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