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성탄축일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육화의 신비를 기념합니다.
공현축일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기념합니다.
성탄축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데 비해
공현축일은 이방인에게 당신을 드러내심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이 땅에 태어나시는 것을 위해
우리 인간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우리에게 찾아와 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바도 없고,
오시도록 우리가 차를 보내 드린 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현에는 우리 인간의 몫이 확실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부터 땅까지의 공현에는 인간이 할 몫이 없지만
이미 이 땅에 오신 뒤에는 인간의 몫이 있는데
우선 오늘 기념하는 동방박사에게의 주님 공현은
아기 예수를 뵈러 온 동방박사의 몫이 아주 큽니다.
아기 예수는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 존재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지만 정말 인간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는
아주 연약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려 있는 분이고,
그래서 동방박사가 찾아와야지만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른 예수는 그제 볼 수 있듯이 안드레아와 요한의 제자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하셨지만 아기 예수는 초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는 어떻게 아기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까?
물론 별의 인도를 받았지만 밤에 하늘을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밤에는 잠을 자는데 박사들은 하늘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절망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박사들은 땅이 절망스러울 때 하늘에서 희망을 찾은 존재들입니다.
모두 현실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을 때
이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본 사람들이고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사람들이며
그렇지만 별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공현을 위해서는 동방의 박사들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어야 하고,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나는 안주치 않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어야 하며
허지만 그 용기가 만용이 안 되게 별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공현에는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몫이 또한 있지요.
아시다시피 주님의 공현축일은 동방박사에게의 공현 말고도
가나 촌의 주님 공현과 세례 받으실 때의 공현도 같이 기념하는데
이때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몫이랄까 역할이 있지 않았습니까?
가나 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낼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이때 주인의 난감한 상황을 헤아리고 마리아가 대신 청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마리아의 청에서 주님께서는 사랑을 보시고 사랑을 드러내셨다는 말인데
지금도 주님의 사랑 공현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사랑의 청을 하는 또 다른 마리아들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내일 우리가 또 기념하겠지만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며 당신을 공현 하시는데
이때 당연히 세례자 요한이 역할을 합니다.
요르단 강에서 물의 세례를 주던 세례자 요한,
주님의 요청에 요르단 강물에 같이 발을 담그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지요.
지금도 주님 공현을 위해서는 우리 중에도 세례를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주님의 수난의 세례의 물에 같이 발을 담글 사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