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르침과 권위에 대해서 묵상코자 하는데
제 생각에 가르침이라면 일단 좋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도둑질이나 야바위를 가르쳐줬다면
그걸 가지고 가르침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지요.
그리고 좋은 의미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강의 또는
가르치는 것 일반을 얘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강의를 들었을 때 신학강의란 것이
나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게다가 강의의 내용이나 방식도 훌륭하다면 좋게 평가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강의 재미있었다거나 훌륭했다고 하지
그 가르침이 대단하다고 하거나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지는 않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쳐줬어도
그것이 지식에 지식을 더 얻는 것일 뿐이라면 그것을
가르침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고 뭔가 깨우침을 주거나
적어도 살아가는 데 유익이 되는 것일 때
그것을 일컬어 보통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거부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어떤 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지는 어떤 힘입니다.
그러나 깡패의 힘, 곧 폭력과 같이 안 하면 얻어터지니까
싫어도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힘은 물론 아니지요.
그런 힘은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힘이고,
순종이 아니라 복종이나 굴종을 강요하는 힘이지요.
그러므로 권위는 속으로는 거역하는 마음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하게 하는 힘이며
그러므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한다면
진정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의 권위일 것입니다.
사랑의 권위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따르게 할 뿐 아니라
사랑으로 그것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 다른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권위는 우리가 인간적으로도 지닐 수 있는 권위이지요.
다시 말해서 덕을 많이 쌓고 덕의 정상인 애덕을 이루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르게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더러운 영들도 복종케 하는 권위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놀라는 것입니다.
요즘 와서 진정한 권위를 발견하기 힘듭니다.
어른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스승의 권위나 성직자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을 합니다.
이것을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젊은이들의 문제라고들 하는데
실은 권위를 포기한 어른들과 스승들과 성직자들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
더러운 영과 썩어빠진 정신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힘,
이런 힘을 지니는 것이 쉽지 않기에 권위를 포기한 결과입니다.
저를 반성하자면 권위가 없기에 권위주의의 충동을 받고
권위주의적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권위까지 포기한 저인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저의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