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의심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말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다고 이야기 해 주면 좋을 것 같고,
더 힘을 내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서 속 쉬원하게 이야기 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한 의심은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더 심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는 것일까?
내 곁에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나는 왜 이런 어려움을 겪을까?
하느님과 멀어진 삶을 내가 살고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정말, 필립보가 예수님께 청했던 것처럼
하느님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면,
'너 잘 살고 있어'라고 말씀해 주신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초대는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제자로 부르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예수님 곁에서 하루를 보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제자로 부르시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요한복음에서는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하느님께로 초대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초대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지만,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면서
메시아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은 처음에는 그 단어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에는 아직 그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저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따라오면 너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런 저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저 단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체험하고 느끼도록 초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서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우리 또한 아직은
온전하게 하느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도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왜 아직도 믿지 못하냐고
왜 이리도 느리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해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에 의심이 생기고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오지만,
그래도 주님 안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셨다는 확신이 없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할수록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그렇게 점점 더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느끼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우리의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런 저런 어려움 때문에 더욱 그러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올 때 더욱 주님께 의지하면서
조금 더 주님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