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며칠 전 저는 다윗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얘기도 그런 다윗의 얘기중의 하나지요.
현재 다윗은 참으로 참혹한 상황입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을 가는 처지인데
그런 다윗에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사울의 건으로 저주를 퍼 부웁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저주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맞 저주를 하지 않는데 그것은 다윗이 성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므이를 보내셔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 같기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어낸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저만해도 피정 강의 때,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강의 할 때
누가 반대나 비판을 하면 그것을 그저 그가 나를 반대하여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느님께서 그를 시켜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누가 눈앞에서 저를 비판하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도 같은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오늘 다윗의 얘기와 제가 경험한 것 때문입니다.
오래 전 얘기인데 프란치스칸 가족 모임을 처음 할 때의 얘기입니다.
이런 모임을 처음 하는 것이기에 정말로 준비를 많이 하였고
온 힘을 다해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모임이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첫 모임이기에 다음에 참고하기 위해서 이 모임이 어땠는지
모두 평가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 너무 좋았다는 평가였기에
준비와 진행이 제게는 아주 힘들었지만 그 힘든 보람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저의 형제 하나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자 그 한마디에 앞의 보람감은 다 날아가고 그 지적 한마디와
보람을 완전히 날려버린 그 형제에 대한 미움과 분노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모임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그 생각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홧김에 술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났는데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거였습니다.
이럴 때 저는 영적일기를 쓰곤 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성찰을 해나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그 형제의 비판이 맨 앞에 있었고 좋은 평가 뒤에 이어졌다면,
부정적 평가가 숫제 그것 하나가 아니라 더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99가 칭찬을 하는데도 그 많은 칭찬은 사라지고
1의 비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가 완벽을 원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즉시 완벽을 바라는 저의 욕심과 교만을 깨시려고 하느님께서
이 형제에게 저를 비판하게 하신 거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즉시 형제를 속으로 미워했음을 용서 청하고
욕심과 교만을 깰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제가 보냈더니
그 형제도 칭찬일색이라 자기라도 부정적인 얘기 하나는 해야 할 것 같아
그리 얘기한 것이지 자기도 참 좋았노라고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 저는 오늘의 다윗 얘기를 생각하면서
반대자와 비판자는 반대와 비판으로 나를 돕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의 시므이로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제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단점만으로
판단했던 지난 날의 잘못은 되풀이되지 않기를
그리고 상대방을 속으로 미워한 행위도
용서를 청하는 용기가 있어야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