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연중 제 5주는 <고통>과 주님, <고통>과 <복음>의 관계입니다.
1독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인물로 여겨지는 욥에 대한 얘기이고,
복음은 질병의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치유해주시는 내용이며
2독서는 복음 선포 사명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여기서 저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욥과 같이 지금 엄청난 고통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어떤 말로 복음을 전하시고 어떤 행위로 복음을 전하셨을까?
이런 사람에게 복음의 행복 선언은 약효가 있을까?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이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은
난치병 환자에게 신약개발이 기쁜 소식이듯
병의 치유에 대한 소식뿐 다른 것은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주님께서도 병자를 치유해주신 거라고 이들은 믿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주님께서 모든 병자를 치유해주지 않으셨다는 것과
‘병을 고쳐주실 거면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지!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인가?’라는 비난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그러므로 병에서 낫게 하시고 고통을 없애주심으로써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기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질병의 고통보다 심리 정신적 고통과 영적인 고통이 더 크고,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불행의식과 불행의 고통이 더 큰 문제지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왜 나에게 고통이?’이라는 거부의식이 문제고,
특히 ‘왜 나에게만 고통이?’라고 할 때 고통은 가중되고 불행해지지요.
다시 말해서 고통을 왜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이해하게 되면
거부의식이 없기에 고통은 여전해도 불행해지지는 않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시고 병자들을 찾아가심은
고통을 근본적으로 없애시거나 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함이고
이것이 사실은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고통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신 주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오늘 복음환호성이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라고 노래하는 그 동병상련同病相憐입니다.
우리가 앓는 병을 같이 앓고, 우리가 앓을 병을 대신 아프신 겁니다.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더 성장케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를 주제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고통 중에서도 행복해야 참 행복이라고 주님께서는
말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찾아가시고,
옆에 계시고,
들어 주시고,
손을 얹어 주시고,
몸을 일으켜 주시고
꼭 필요하면 치유도 해주시고,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셔서 또 똑같이 복음을 사랑으로 전하시는 겁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는 안 찾아오시고 우리는 빼먹으실까요?
제게 기도 부탁하신 분 많은데 저는 혹 빼먹어도 주님은 안 빼먹으십니다.
그런 불행의 고통이 아니라 행복의 고통을 살려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은 혼자가 아닌
다른 존재와 관계가 있을 때 가능하군요
누군가를 찾아가고
누군가의 옆에 있어주고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누군가의 몸을 일으켜주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찾아가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나하나 쪼개보면
저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