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동정 마리아의 모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구세주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올해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성찰하고자 합니다.
모든 축일의 본기도가 아름답고 축일의 의미를 잘 담고 있지만
특히 오늘의 본기도가 더 아름답게 축일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기도는 먼저 하느님께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노래하는데
여기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지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의 요청에 의한 것도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계획에 따라 오신 것이고,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 가듯 우리 인간을 따라 오신 겁니다.
이것은 인간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래서 이런 사랑은 그저 시혜施惠의 사랑이 아니고 동화同化의 사랑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랑이 더 큰 사랑입니까?
부모가 아이에게 밥해주는 사랑이 큽니까, 아이처럼 낮추는 사랑이 큽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랑이 큽니까,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사는 사랑이 큽니까?
이번에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칸 인물전 여섯 번째 책이 나왔는데
김병홍 요한 형제에 대한 것으로 저는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가난과 겸손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의 삶이 육화肉化와 동화同化의 삶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선 그는 넝마주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넝마주이와 구두닦이 고아들과 같아지기 위해 아예 집을 나와
천막을 짓고 같이 살았으며 같은 차림새로 넝마주이 일을 했습니다.
이는 그들과 완전히 같아지기 위해서인데
그가 이들과 완전히 같아지려 한 것은 재속 프란치스칸인 그가
사부 프란치스코와 완전히 같아지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나병환자와 달리 살면서도 얼마든지 나병환자를 위해 일을 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들 가운데서 같이 살기를 원했고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 같은 분은 나병환자와 같이 살다가
똑같이 나병환자가 되어 돌아가시는 사랑을 실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이었고,
예수님이 나병환자였기에 나병환자와 일치하고 동화되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하고 동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신화神化의 사다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를 사다리 삼아 예수님께로 갔고,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다리 삼아 하느님께로 가
신성神性에 참여하고 신화神化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병홍 요한 형제도 프란치스코를 사다리 삼아 예수님께로 갔고,
예수님을 사다리 삼아 하느님께로 가 신화되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기도가 마지막으로 노래하듯
말씀이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는 신성에 참여케 되는 것이고,
오늘 말씀이 육화되심을 기리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은
우리가 신화됨을 기리고 육화와 신화가 교환됨을 기뻐하는 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