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이 마르코 복음사가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가 누구에게 선택되었는지,
어떤 일에 선택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생각게 되는데
여러분과 함께 선택되었다고 하였으니
베드로 사도의 아들로 선택되었다는 뜻이 아니지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느님께 선택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베드로처럼 복음 선포를 위해 선택된 겁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와 마르코 복음사가와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 간에 어떤 유대감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간에는 같이 하느님께 선택을 받았고
그래서 같이 복음 선포를 하는 사람이라는 유대감이 있는 겁니다.
과거 한 곳에서 같이 복음 선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현재는 이곳과 그곳에서 각기 복음을 선포하는 동업자로서,
그것도 보통의 동업자가 아니라 각각의 곳에서 복음 선포하느라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로서 느끼는 동병상련의 유대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유대감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같이 놀러 다니고 같이 취미생활 하는 동호회적인 유대감이나
좋은 일을 하지만 때깔이 나는 일을 같이 하면서 느끼는 고상한 유대감이
아닌, 정말 고생고생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유대감 말입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승리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면서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지원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기적이 뒤따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면 복음 선포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나겠지요.
그런데 오늘 베드로 서간을 보면 복음 선포의 여건은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어려운 상황이나 여건에서 어떤 복음 선포가 적절하겠습니까?
어떤 자세와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까요?
오늘 베드로 사도의 편지는 이에 대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하시도록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는 방식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돈을 많이 들고 가서 시혜를 베풀고 떵떵거리는,
승리주의의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돈이 복음을 선포하고 힘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하시도록 복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을의 영성을 살기 위해서 이곳 가리봉에 와 있지만
또한 이주노동자 선교라는 뚜렷한 목적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효과적인 선교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픈 유혹이 아주 큽니다.
‘이렇게 하면 선교가 성공할 텐데’하는 유혹이 큰 것인데
선교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을 하는 것이고
갑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처럼 을의 삶을 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다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