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사 모든 일이 변방 노인의 말과 같다는 얘기지요.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간략히 다시 짚어보면 이런 얘기지요.
변방에 사는 노인이 말을 길렀는데 그 말이 그만 도망을 가서 슬퍼했지요.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말이 다른 준마를 데리고 돌아와 너무 기뻤지요.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마침 전쟁이 나 성한 젊은이는 다 전쟁에 끌려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만은 징병을 면하여 다른 사람처럼 전사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인간의 길흉화복을 인간으로서 그때는 다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그때그때의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지요.
요즘 사도행전에서 읽는 바오로 사도의 얘기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이려는 사람들로 인해 쫓겨나기를 수없이 했는데
쫓겨남이 새로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기회로 바뀌곤 했지요.
오늘도 이코니온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험이 닥치자
리카오니아로 피해 갔는데 거기서 앉은뱅이를 고쳐주게 되고
큰 환영을 받으며 복음을 선포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그 앉은뱅이를 고쳐줄 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고쳐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앉은뱅이는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게 됩니다.
구원이 아니라 치유를 받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사를 돌팔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명의라도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믿지 않으면 치유를 아예 거부하거나 억지로 치료를 받더라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에 치유의 힘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얘기하듯 치료와 치유는 다르고
치료한다고 치유가 다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치유의 기적 다음에 꼭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시지요.
주님께서 살리신 거지만 믿음이 치유의 힘을 받아들인 거기 때문입니다.
믿을 때 우리는 개방을 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잖아요?
그리고 개방을 해야 주님도 들어오고 치유의 힘도 들어오는 거잖아요?
치유가 이럴 진데 구원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구원자를 믿어야 하고, 그 전에 구원을 갈망해야 합니다.
치유란 병이나 상처의 치유 정도지만
구원은 존재의 치유이고 전 존재적인 불행의 치유이며
불행의 치유도 한 때의 불행을 치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불행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치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앉은뱅이는 자기의 불구를 치유하는 정도를 갈망하지 않고
존재의 구원을 갈망하고 그 구원이 주님으로 인해 가능하다고 믿은 겁니다.
앉은뱅이도 한 때는 자기의 불구 때문에 자기가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치유만 원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고통/불행이 지속되자 한 편으로는 그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고통/불행이 숙성이 되어 인생을 깊이 숙고하게 되고,
그래서 신체적인 불구의 치유가 아니라 존재적인 구원을 갈망케 된 거지요.
그렇습니다.
앉은뱅이의 구원에 대한 갈망과 믿음은 이 숙성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빨리 벗어난 고통에서는 구원에 대한 갈망과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랜 고통과 무엇보다도 오랜 불행을 견디며 인생을 깊이 숙고한 다음에야
구원에 대한 갈망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래 숙성된 포도주와 된장이 맛있듯
숙성된 고통과 불행이 우리에게 깊은 숙고를 하게하고 구원을 가져다줌을,
그래서 우리는 당장의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함을,
그래서 우리는 고통 중에서 조급해하지 말아야 함을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저의 삶에서도 구원의 대한 갈망이 늘 넘치기를
"내가 주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의식(목요일 말씀나눔)" 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임마누엘의 삶을 그려 갈텐데...왜..
감사합니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내장 수술을 미루고 있는 제 눈의 흐리게 보이던 막이 한장 떨어져 나가는듯 밝아지니 창밖을 올려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