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부활시기가 거의 끝나 가고,
그래서 시기 내내 읽었던 요한복음도 거의 끝나 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 사도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다 아신다고 베드로 사도가 토로하듯이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아시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도 다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몰라서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흔히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과는 다른 거겠지요.
남녀 사이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도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고,
부부 간에도 수시로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그런 게 아니지요.
그리고 알고는 있어도 남편의 고백을 꼭 말로 듣고 싶어 하는 아내처럼
주님도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굳이 듣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닐 겁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중에도 표현치 않으면
사랑이 식은 건지 없는 건지 불안해하고,
꼭 표현을 해야지만 느끼는 사랑의 장애를 어느 정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장애를 가지고 누가 가지는 것입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쓰레기장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을 봅니까, 쓰레기를 봅니까?
쓰레기를 보지 않고 꽃을 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왜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나쁜 것을 선택합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면서도 쓰레기를 봅니다.
꽃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서 쓰레기장을 각오한 사람은
와, 쓰레기장에 꽃이 피었네! 하며 꽃에 집중을 할 것이고,
그래서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도 꽃만 볼 것입니다.
그런데 꽃만 있기를 바란 사람은
왜 꽃밭에 쓰레기가 있어! 하며 몇 개 있는 쓰레기에 눈이 꽂힐 겁니다.
사랑만 받기를 바라고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만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가 나를 미워할까봐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미움만 보게 되며 그래서
그에게 나에 대한 사랑이 있음에도 사랑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불신을 하여 의처증, 의부증과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와 같을 리가 없으시고 그래서
사랑이 많지 않아도 우리에게 사랑이 있음을 아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 사랑을 아신다고 믿는데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알고 계심을 믿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다 지니고 있고,
전혀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은 있으며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가 사랑이 없지 않고 많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는지를 묻고,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왜 사랑하는지만 묻지 않고, 더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겁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당신 양떼를 맡기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목자가 되려면 양들과 똑같은 사랑을 가져서는 안 되지요.
주님은 분명 사랑에 대해서 물으신 다음 “내 양들을 돌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점은
양들을 사랑하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 없이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기에 이웃 사랑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양들도 사랑하는 것이어야 우리는
사랑의 대가를 양들에게 바라지 않기에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음을
명심하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신부님~^^♥
힘이되는 좋은 말씀~~
빛을 보고,
꽃을 보고,
사랑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