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얘기하는데,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헷갈리며 대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럼 나쁜 짓, 악한 짓도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거라는 말인가?
당연히 악한 짓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고,
그리고 인간의 만족을 위해 인간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이 많지요.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의 뜻은 무엇입니까?
영감靈感이라는 말이 있고 좋은 영감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말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는 생각이랄까 마음을 외부의 영이
우리에게 주거나 우리 안에 불러일으켰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리고 좋은 영감은 그 좋은 일이 어떤 좋은 일이건,
아주 좋은 일이건 조금 좋은 일이건,
좋은 일에 불순한 의도가 있건 없건,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가 있었건 나중에 불순한 의도가 들어갔건
상관없이 외부의 좋은 영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 외부의 좋은 영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령인데
설사 나의 만족과 나의 성취를 위해 좋은 일을 생각했어도
좋은 일은 좋으신/선하신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거라는 거지요.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수도자로 성직자로 부르시는데
엄마가 원해 수도원에 들어오는 경우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우릴 부르시고,
자기 성취의 경우 그 성취 욕구를 이용해서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지요.
옛날에 신학생 형이 방학 때 집에 오면 엄마가 쌀밥을 해주는 것이 부러워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신부가 됐다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어떤 영에 의한 것인지 잘 식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악령에 의한 것인지 성령에 의한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고 내 안의 육의 영에 의한 것인지 말입니다.
악령에 의한 것은 일도 나쁘고 의도도 나쁘지요.
알면서도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안 좋은 일,
곧 남을 죽게 하고, 파괴하고, 불행하게 하고, 괴롭히는 그런 일을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식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앞서 봤듯이 좋은 일 안에 불순물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일은 좋은 일을 하지만 주님의 영에 이끌리는 부분과
육의 영에 이끌리는 것이 혼재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순전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때문에 좋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으로 시작하였는데 어느 새 좋은 일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거나 칭찬을 받지 않더라도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서 할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육의 영이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악령이라면 악한 짓을 하게 하지만 육의 영은 악한 짓을
하게 하지는 않지만 선을 자기의 것으로 사유하는 죄를 짓게 하지요.
악한 짓을 하는 죄와 선한 일을 하지만 선을 소유하는 죄의 차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바벨탑으로 인한 불통을 극복하고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소통이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하지 않고 나와 다른 선으로 인정하고
은사와 직분이 달라도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그래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은 사랑이요 충만이시기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웃의 죄를 보지 않고 고통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게하고 화해를 하게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성령께서 가져다주시는 최대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말씀의 은사 같은 것이 아니고,
용서할 수 있는 은혜이고 그래서 화해를 이루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바로 이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완전히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고,
그래서 가장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용서는 행복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