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요즘 와서 저는 지혜를 생각하면 겸손과 동일어처럼 느껴집니다.
자기주제를 모르고 다시 말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르고
잘난 줄, 최고인 줄 알고 나대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잘난 줄 알고 날뛰다가 깨지면 얼마나 창피합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고수 앞에서 나대다가 고수가 나타나
자기 밑천이 그대로 드러나면 무척 부끄러운데 바로 제가 그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지혜하면 겸손이 연상되는 더 간절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오늘 독서 덕분에 저 자신을 들여다보니
저는 저의 한계와 연약함과 죄스러움을 직면하고,
이런 나를 사랑하고 자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에
정작 저는 저 자신을 외면하면서 다른 사람의 평가만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것까지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아직 괜찮은 수도자로 인정받거나 사랑받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아직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이거나 필요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그러기에
사람들로부터 망각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아직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이 나이가 됐으면 이제는
자신을 진정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는데
아직도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놓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고 있으며
좋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느끼려 하는 저를 봤기 때문이지요.
참 가련한 존재지요.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다는 말이
그래서 오늘 제게는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저를 하느님과 사람들과 제 자신 앞에 내놓는 것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에서 오는 지혜로움 덕분에 제가 순수해지면
다음 단계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해지는 것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제 안에서 제가 저 자신에게 관대하거나 유순하지 않았고
저 자신과의 싸움으로 인해 평화롭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제가 안에서 평안하지 않으니 밖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지 못했지요.
그러지 않습니까?
안에서 평화로운 사람이 밖에서도 평화롭고,
자신에게 관대하고 유순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하고 유순하지요.
그리고 야고보 사도가 세 번째로 얘기하는 자비와 좋은 열매가 풍성함은
이런 평화와 관대함과 유순함이 가져다주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자비가 진정 평화와 관대함과 유순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를 많이 썼는데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풍성하지 않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부실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위에서 오는 지혜가 아닌 인간의 얕은 지혜로 뭣을 도모하였거나
아직 순수함, 평화, 관대함, 유순함 등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