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베드로서는 순종과 욕망을 대비시키면서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욕망에 따라 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욕망이라는 말 앞에 ‘무지하던 때’를 덧붙이는데
무지하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것과 다른 것일 텐데 뭐에 무지했다는 건가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몰랐다는 뜻일 겁니다.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당연히 욕망대로 살지요.
그런데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도 여러 질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교만의 무지입니다.
교만할 때는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런데 자기밖에는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안과 밖이 있다고 할 때 자기만 알고
자기의 밖에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 아닙니까?
교만하면 너무도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기에
너무 자기에게 집중하다보니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도 모르고 거리낌 없이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모르는 것일 겁니다.
이제 하느님을 안다 해도,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알기는 알아도 하느님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는 겁니다.
좋은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좋은 것을 좋아하게 되면
이 좋아하는 것에 흠뻑 빠지게 되고 그래서 중심이동이 일어날 겁니다.
심지어 좋아하는 취미가 생겨도 욕망에 따라 퇴폐적으로 살던 사람이
그 짓을 그만 두고 취미생활을 건전하게 하게 되는데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면 더더욱 하느님 취향이 되어 살겠지요.
술밖에 몰라 술에 취해 흥청망청 방탕하게 살 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등산에 맛들이면 삶 전체가 바뀌는데
하느님 취향이 되면 그 이상으로 전에 살던 삶과 달라 질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고 정신을 차린 사람은 더 이상 욕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하느님께 지향을 두고 하느님 취향의 사람이 될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바로 앞에서 순종하는 자녀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 뜻을 모를 때는 순종치 않고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았지만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안 이상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하느님 뜻을 우리가 정말로 모를까 성찰을 해봅니다.
의도적인 무지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 뜻을 몰라 욕망에 따라 산 적이 있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미 알고도 눈 질끈 감고 욕망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가 욕망대로 살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모르는 척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욕망대로 살았다면
개전의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알고도 욕망대로 산다면 하느님의 진노를 면지 못할 것이고 그때에야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게 되겠지요?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며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