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간의 내용은 제게는 참으로 새길 것이 많아서
하고 싶은 얘기도 많습니다.
우선 성실하신 하느님과 그렇지 못한 저에 대해 생각게 합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십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한결 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십니다.
그리고 저도 성실하다고는 생각합니다.
100 명을 기준으로 성실한 사람 상위 10%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성실한 것이 어떤 성실함인지를 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저는 제가 맡은 일과 책임에는 무척 성실하고
맡겨진 일과 책임에도 성실함이 못지않습니다.
그리고 관계들에도 비교적 성실합니다.
그런데 저의 성실함이 하느님께 대한 성실함인지는 미지수입니다.
제가 아무리 성실해도 하느님께 성실하지 않다면 신앙인인 제게
그 성실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혹 그 성실로 제가 저의 일에서 성공을 거둘는지는 몰라도
하느님의 은총의 성실함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 은총의 성실함입니다.
성실함에 있어서 하느님 은총과 우리의 관계는
주님 말씀하신 대로 됫박의 관계입니다.
네가 되어주는 그 됫박대로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 그릇대로 하느님 은총이 주어진다는 말도 되는 거지요.
이에 대해 오늘 서간은 이렇게 약간 비틀어서 얘기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면 함께 살 것이고 견디어내면 함께 다스릴 것이며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거라고.
오늘 또 제가 묵상한 구절은 이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말씀은 어떤 쌍날칼보다 힘세다는
바오로 사도의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고,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선포될 거라는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허나 이 말씀에 담겨 있는 다른 메시지에 저는 오늘 집중해 봅니다.
곧 바오로 사도 자신이 갇혀 있지만 하느님 말씀이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은
자신이 갇혀 있거나 심지어 자신이 죽어 없어져도
하느님의 말씀은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전해질 거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내 것, 곧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며
오히려 자신이 하느님 말씀의 도구이며
자신뿐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도구는 많다는 믿음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강하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말씀 선포라는 좋은 일도 자기가 독점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 강하게 남은 이유는 저도 점점 하느님 말씀선포에 있어서
퇴물이 되어 가는데 그것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도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지고 못쓰게 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몽당연필과 삭아버린 삽입니다.
옛날 필기구가 귀할 때 몽당연필은 볼펜 껍데기에 껴서 쓰곤 했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할 정도로 다 쓰이고 나면 그 용도가 끝나지요.
옛날 삽이 오래 되면 닳고 닳아 끝이 뭉툭하게 되고
쇠가 산화되어 중간부분이 쇠인데도 삭아 이제 더 이상 흙을 파는데
쓸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뒷간에 재로 똥을 덮는 데나 쓰이곤 했지요.
이제 저는 이런 몽당연필이나 닳고 삭은 삽처럼 되어가고 언젠가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제가 아닌 다른 도구에
의해 선포될 텐데 그것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씁쓸하게 공감 합니다.
몽당연필이 되어가는것!
굳이 내가 도구가 아니어도 되는것!
겸허히 받아 들이는 과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