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락을 위해 지금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미래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하려면
현세에서 고통스럽고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신앙이라면
우리는 굳이 이런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세에서 행복할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 때문에 온 가족이 풍비박산 나야 한다니 우울하고,
김대건 사제의 가족이 실제로 그랬기에 과연 이렇게 신앙생활을
꼭 해야 하는지, 김대건 사제를 본받아야 하는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믿어서 득 될 것 없어 믿지 않고,
일부 개신교는 하느님을 믿으면 3박자 복을 받는다고 하여 신자가 많은데
오늘 복음처럼 받는 복 없고 주님 때문에 박해만 받는다면 누가 믿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진복팔단의 여덟 번째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여기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한데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고는 이어지는 말에선
현세에서 박해를 받으면 하늘에서 상을 받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는 현재적으로 행복하다고 하고,
뒤에서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함으로써 미래의 행복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뭡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느님 나라의 소유가 현재라는 겁니까, 미래라는 겁니까?
현재 행복하다는 겁니까, 미래에 행복할 거라는 겁니까?
제 생각에 이 말씀은 상은 미래에 받지만
현재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만 박해를 받아들이고,
박해를 받아도 행복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박해를 받아도 어떻게 동시적으로 행복하겠느냐의 문제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고,
박해를 받아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미래에 받을 상을 상상하면 지금 행복할 수 있나요?
상상이 아니라 확고하게 믿으면 지금 행복할 수 있나요?
그것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요 방법이지만
고통이 불행이 아닌 사람,
고통 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적으로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고통 중에도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뭡니까?
그것이 바로 Passion의 사랑입니다.
누구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랑이 Passion의 사랑입니다.
내가 받을 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나를 위한 거지요.
그런데 그 ‘때문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느님 때문이라면
현재적으로도 가장 완전한 충만함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미래의 상까지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하느님께서는 강요를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만 고통과 박해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이 없고 그저 현세의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우리여도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행복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까지 미뤄지는 것일 뿐이고,
주님 사랑을 받고 사랑도 하는 사람이 이제부터 영원히 행복한 것일 뿐이지요.
이것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김대건 사제 축일입니다.
한국의 첫 사제 김댜건 성인 이시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