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 답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의도하신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것이 더 쉬운지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생각 속에서
병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벌로 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병자들은 모두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연히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불렀기에,
스스로도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은
절반만의 치유,
아니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일시적인 치유만을
의미했습니다.
즉 내 안에 있는 잘못이 온전히 용서 받지 못한다면,
내가 지은 잘못에 대해서 온전히 기워 갚지 못한다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것처럼 보이는 육체의 병은
또 다시 생겨날 것이라는 생각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병이 치유되고도
마음의 병이 치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용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가지고 왔습니다.
죄의 용서로 나는 더 이상 벌을 받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육체의 병을 치유하시지 않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
더 쉬운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쉬운 방법을 선택하신 것은
그 사람이 더 쉽고 더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을 위험이 빠뜨리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도
그러한 일이 율법학자들의 반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올 어려움보다는
병자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을 더 크게 보셔서,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무릅쓰십니다.
나에게 고통이나 시련이 올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에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