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중 제 14 주일의 주제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첫째 독서 에제키엘 서에서는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언자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말에서는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지요.
헌데 구약에서는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예언을 자기가 좋아서 하거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을 예언하지만 실은 미래 일에 대한 예언보다는
현재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존재이고,
그리 안 할 때 너희는 벌을 받게 될 거라고 예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보통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두 가집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그가 예언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듣기 싫은 말을 하느님의 말이라며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언자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인정과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목수 요셉과 평범한 주부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어려서부터 뻔히 아는 누구누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이 어디서 왔을까
놀라워하면서도 믿을 수 없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와 기적은 인간 마리아와 요셉의 집안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나온 건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지요.
이것을 오늘 여러분은 첫 미사를 드리는 이 새 사제에게서 봅니다.
새 사제의 가족을 보면 수도원에 들어올 때 아무도 신자가 아니었고,
가족 중에 어머니와 형수님만 새 사제가 수도원 입회 후 세례를 받아
아버지와 형은 지금도 신자가 아닙니다.
이에 비해 저는 온 가족이 신자였고 구교 신자로서 아주 열심했으며
무엇보다도 제 고향이 사제 수도자가 많이 난 곳입니다.
저의 부모 세대에서 주교님서부터 신부까지 여러 분이 나왔으며
저희 세대에서 10 명 가까이 사제가 나왔고 수녀님들도 여럿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성소 사관학교 출신이라면
이 새 신부님은 성소 변두리학교 출신입니다.
그래서 제가 새 신부님의 수련장으로서 저와 비교하며 생각할 때마다
이런 환경에서 입회한 형제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어떻게 여기서 성소가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곤 하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이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서
나올 수 없었기에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 것처럼
새 사제도 이 가정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새 사제의 성소가 하느님의 부르심인 것이지요.
그런데 새 사제뿐 아니라 저도 여러분도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고
부르신 것은 예언자로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런 성소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고
주님의 파견에 기꺼이 예스 할 것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제가 알기로 새 신부님은 자신의 성소가 이러하고
이런 믿음과 의식이 투철하시기에 선교사로 파견되는 것에
기꺼이 응답할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준비 차원에서 유학도 하셨지요.
그것도 선교하기에 제일 어려운 이슬람 지역으로 가길 원하시는데
거기는 선교의 ‘선’자도 꺼낼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그곳에 가는 것은 오늘 에제키엘 서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도 에제키엘서 말씀처럼 그리고 새 사제가 앞으로 살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파견을 받는 사람, 곧 예언자로서
환영을 받건 받지 않건,
듣기 싫은 소리를 하여 듣든 듣지 않는
하느님 이름으로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던 말던 아이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