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주님은 왜 모습이 변하셨을까?
우리처럼 변모의 필요가 당신께 있어서일까?
그렇다면 몰래 변모치 않고 왜 제자들 앞에서
그것도 세 제자들 앞에서만 변모하신 것일까?
제가 오늘 너무 감상에 젖어 이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변모를 눈을 감고 묵상하니
임종자의 아름다운 이별 영상이 그려집니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할 엄마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너무도 보고 싶었지만 병상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병원에 자주 오는 것은 못하게 하였습니다.
허나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이별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래 고민을 하였습니다. 어떤 모습을 아이들에게 남길 것인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이 크지만 그 고통과 죽음보다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처절한 사랑보다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오기 몇 시간 전부터 공들여 화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가장 처절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려는 사랑,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케 하고픈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변모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도 이런 의도였을 텐데
당신의 수난 예고 사이에 이 변모 사건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모습은커녕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게 될
당신이 실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라고,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고 사랑을 기억하라고
부활과 희망의 모습을 밝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 변모의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주님의 화려한 쇼나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봐야 하고
우리의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마라톤을 완주하거나 장거리 연습을 할 때마다 이런 경험을 합니다.
정말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그 고통이 끝이 없을 것 같고
고통밖에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그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데
이 때 저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은 것임을 생각하며 의지적으로
희망을 보고 사랑을 느끼며 봉헌하는 마음으로 완주하려고 합니다.
곧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나의 고통을 아픈 사람을 위해 봉헌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 변모 축일에 진정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보며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내가 되는 그 정도를 넘어
우리의 모습을 주님의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것, 곧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망의 나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나로,
희망을 볼 수 있는 나에서 희망을 주는 나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수난과 사랑을 똑같이 느끼기를 갈망하여
주님과 똑같이 오상을 받게 된 것처럼 모습이 같아지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모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클라라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앞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 본질의 형상 안에 두고
관상을 통하여 그대 자신 전부를 그분 신성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십시오.”
우리를 주님 앞에 위치시키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
그리고 매일 수난과 부활의 그 주님 사랑을 관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임을 깨닫는 오늘 축일입니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아멘.
우리 사부와 성녀 클라라~!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