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신 신비,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념하며,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서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빵이신 예수님의 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이기에, 우리를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한다는 것일까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계속 그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 때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역시, 내 존재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기를 갈망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육신이 아니더라도, 이름이나 명예로라도 이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접하는 표현 중에 ‘가문의 영광입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 표현에서, 우리 존재가 잊혀 지지 않고, 기억 속에서라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존경할만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고, 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루카 복음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부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처럼, 당분간 걱정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만큼의 많은 재산을 모아 두고서는, 자기 영혼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날 밤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6)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것 중에, 생명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행복은, 생명 자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많은 재화를 모으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업적을 쌓는 일’ 정도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행복도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세상을 살아가고, 유한한 것 안에서 행복을 찾는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 또한 사라져버리고 마는 유한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무한한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미 약속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방법은 너무나 어렵고,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곧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 다음에 찾아오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죽음을 겪으시고, 영원한 삶으로 다시 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다른 점이 무엇이기에, 그 죽음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은,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인간이 되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사랑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온 생애를 바쳐, 인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 그 결과 맞이하였던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사랑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사랑은 죽음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그 무언가를 살리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과 자기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하철에 떨어진 중년을 위해 목숨을 내 던진 젊은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이의 생각과 행동이 참으로 거룩하고 기특하고 위대하구나! 중년의 목숨은 살렸으나, 자신의 목숨을 잃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나?’ 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며,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죽음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시고, 당신께서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줄 때, 내가 영원한 생명에 한 발자국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고, 갈망하며, 이루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곧,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삶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살과 피를 먹고,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과연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또 삶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서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빵이신 예수님의 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이기에, 우리를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한다는 것일까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계속 그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 때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역시, 내 존재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기를 갈망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육신이 아니더라도, 이름이나 명예로라도 이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접하는 표현 중에 ‘가문의 영광입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 표현에서, 우리 존재가 잊혀 지지 않고, 기억 속에서라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존경할만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고, 내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루카 복음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부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처럼, 당분간 걱정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만큼의 많은 재산을 모아 두고서는, 자기 영혼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날 밤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26)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것 중에, 생명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행복은, 생명 자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많은 재화를 모으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업적을 쌓는 일’ 정도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행복도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세상을 살아가고, 유한한 것 안에서 행복을 찾는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 또한 사라져버리고 마는 유한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무한한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미 약속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방법은 너무나 어렵고,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곧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 다음에 찾아오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죽음을 겪으시고, 영원한 삶으로 다시 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다른 점이 무엇이기에, 그 죽음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은,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인간이 되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사랑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온 생애를 바쳐, 인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 그 결과 맞이하였던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 죽음은 사랑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사랑은 죽음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그 무언가를 살리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과 자기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하철에 떨어진 중년을 위해 목숨을 내 던진 젊은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이의 생각과 행동이 참으로 거룩하고 기특하고 위대하구나! 중년의 목숨은 살렸으나, 자신의 목숨을 잃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나?’ 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며,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죽음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시고, 당신께서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줄 때, 내가 영원한 생명에 한 발자국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고, 갈망하며, 이루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곧,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삶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살과 피를 먹고,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과연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또 삶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