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과 음식규정과 관련한
논쟁을 신랄하게 하신 다음 이방지역으로 물러가신 겁니다.
그러면 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 걸까요?
유다인들, 그중에서도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이 꼴 보기 싫어서
이방지역으로 물러가신 걸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쫓겨나신 건가요?
아니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들어가신 걸까요?
이스라엘만을 위해 오셨다면서 왜 이방지역에서 이방여인을 그렇게
모욕적으로 대하셨을까요? 그들 마음을 득득 긁어놓기 위해서일까요?
주님은 유다인들과도 다투고 이방여인과도 다투는 싸움꾼일 뿐인가요?
그러실 리 없다고 저는 믿고,
유대인을 피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찾아서 가셨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왜냐면 주님의 사랑에는 우연이 없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만남은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가나안 여인을 그리 무시하신 겁니까?
제 생각에 주님의 무시는 의도적이고 그래서
그 무시는 우리가 보기에 악이어도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무시는 교만에서 비롯된 죄악일지라도
주님의 이 무시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에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막 불이 붙어 불길이 겨우 겉에 붙고 불꽃도 작은 불은
약한 바람에도 꺼지고 한 움큼의 물에도 꺼집니다.
그러나 불길이 장작 안으로까지 파고 들어가 활활 타오르는 불에게는
바람도 물도 불길을 더 크게 일으키고 불을 더 뜨겁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의 불이 존재 깊숙이까지 들어가지 않은 구원의 열망은
그 청이 거절되었을 때 한 번의 거절로도 그 불이 꺼지지만
사랑의 불이 존재 깊숙이까지 들어간 구원의 열망은
그 청이 무참히 거절되었을 때 더 강해지고 뜨거워지지요.
사실 한 번에 식어버리는 열망은 열망도 아니지요.
그러나 가나안 여인의 열망은 참으로 강렬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여인이 나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질러댈 때부터 아셨으며,
그래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주님께서 계속 무시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포기치 않을 것임을 주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기치 않고 요청하는 여인의 열망은 포기할 수 없는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믿음이 진정 큰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물 한 방울로도
우리를 채우고 남는다고 믿지요.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이 바로 이렇게 큰 믿음을 가졌기에
주님께서 강아지 운운하며 빵을 줄 수 없다고 하셔도
그 부스러기 사랑으로라도 자기 딸을 구해 주실 거라고 믿지요.
그러니까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과 우리에게 모범이요 도전인데
이웃/딸은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은 철석같이 믿는 참 신앙인의 모범이었고
주님께서는 여인이 이렇다는 것을 이미 아셨기에 부러 무시를 하신 겁니다.
음식규정이나 따지고 사랑이 하나도 없는 이스라엘 율법학자 나부랭이들아,
너희는 이 여인의 사랑과 믿음을 봐라! 얼마나 대단하냐!
너희가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의 이 믿음을 봐라! 얼마나 대단하냐!
이렇게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일부러 이방지역으로 가신 것이고
여인을 부러 무시하신 것인데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 여인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