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은 참으로 가차 없으시다는 거였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의 정체를 옳게 얘기할 때는 극 칭찬을 하시더니
수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을 극구 말리니 극 비난을 하십니다.
그런데 가차假借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거짓 또는 임시라는 뜻의 가假와 빌린다는 뜻의 차借가 합쳐진 말이니
거짓으로 빌려오는, 또는 임시로 빌리는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고
사실 그대로 가감 없이 또는 봐주지 않고 그대로 대하신다는 뜻이지요.
당신의 정체에 대해 정답을 기특하게 맞혔으니
그리고 당신을 흐뭇하게 하였으니
틀린 것이 좀 있고 잘못한 것이 좀 있어도 눈감아 줄법한데 이리 가차 없이
나무라시니 주님께서는 참으로 인정이나 사랑이 전혀 없는 냉혈한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인정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정은 있어도 사랑이 없거나 부족한 우리와 다른 점이지요.
우리 인간은 인정에 끌리거나 얽매여 의에 어긋나는 사랑을 하거나
자기 수에 틀리면 인정사정 보지 않는 진짜 냉혈한이 되기도 하지요.
오늘 베드로는 이런 우리 인간이 범한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주님의 정체를 얘기할 때는 성령에 이끌려 답을 하였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인정에 끌려 그 길을 막고 나섬으로 당신 길의 걸림돌이라는,
더 심하게는 사탄이라는 비난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여 극 칭찬의 반석, 받침돌에서 극 비난의 걸림돌이 된 것이고,
더 한 것은 주님의 증언자에서 사탄으로 급 추락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정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정이 사랑의 일종일 수 있습니다.
참 사랑과 합치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인정은 기준이 자기이기에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기준인 참 사랑과 합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과 정의에 어긋나게 작동할 때가 많고,
특히나 십자가와 만나면 정나미가 떨어져 그 길을 거부하고
반대의 길로 치달으려고만 하지요.
십자가의 길이 하느님께로 가고 부활로 가는 사랑의 길인데
그 길을 못 가게 하니 이럴 경우 정情은 걸림돌이고
인정에 끌리는 사람은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정이 이런 것이니 모정母情이나 부정父情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는
프란치스코가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욕심도 있었지만 아들을 사랑하여 그리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정에 끌렸기에 하느님의 뜻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고
아들이 참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지 않았지만
결국 주교님의 법정에서 옷까지 홀라당 벗어 돌려주며
이제부터 하늘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프란치스코는 선언하였고 결국 베르나르도네는 아버지의 지위를 뺏깁니다.
정과 사랑의 분별을 잘해야 함을 각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