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번 클라라 축일의 주제를 이렇게 잡아봤습니다.
나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주제를 잡은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고,
독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화를 담아주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클라라 축일에 왜 이 복음과 독서를 택했을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클라라 성녀가 이런 분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클라라 성녀는 늘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있었고
그의 안에는 보물이 담겨있었지요.
그에 비해서 우리가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싫증을 내고 떠도는 것입니다. 곧
역마살이 낀 사람은 싫증 때문에 어디도 마음 주지 못하고 떠돕니다.
다른 하나는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해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겁니다. 곧
방황을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은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돌아다닙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또 다른 이유, 더 근본적인 이유로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데
하느님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경우입니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이고,
천국이 없다는 것이며 행복의 나라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고
그래서 안식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며 배워야 할 것은
클라라처럼 인격적인 삶과 그 머묾을 배우는 것입니다.
소유적인 삶과 그 집착이나 싫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합니다.
왜냐면 좋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통 좋은 것은 가지고 싶어 하고
싫은 것은 버려버리잖아요? 싫은데도 가지고 있지는 않지요.
그러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좋은 것을 포기할 뿐 아니라
좋아하는 것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은 본능적이기에 쉽고
그래서 쉬운 것을 택해서 사랑하려 하지 않고 좋아합니다.
흔히 요즘 젊은이들이 ‘나 너 좋아해’라고 하며 사랑 고백을 하는데
그것이 실은 사랑 고백이 아니라 호감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고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 가서 어떤 물건을 보고 ‘아, 이거 좋다!’고 하는 것은
‘아, 이거 갖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다행히 돈이 있어서 그것을 사면 처음에는 그 좋아하는 것을
내 거로 만들었기에 아주 기뻐하고 애지중지 하지만
다른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이내 그 좋아하던 것은 싫증나고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소유와 싫증, 소유와 싫증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건의 경우 싫증이 나면 버릴 수 있는데 사람의 경우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합니까?
버리고 싶고 결혼한 경우 이혼하고 싶은데 버릴 수 있습니까?
버릴 수 없으니 같이 살면서 계속 불만하고 미워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것을 포기할 뿐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때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클라라의 가난이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클라라의 사랑입니다.
클라라는 가난했기에 보물을 자기의 질그릇에 담을 수 있었고
사랑했기에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 온 마음 바쳐 이 거룩한 잔치를 누리게 된 여인은 정녕 복됩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천상의 모든 복된 무리가 끝없이 경탄하며.
그분의 애정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그분께 대한 관상은 생기를 주며,
그분의 어지심은 우리를 채워줍니다.
클라라는 하느님의 사랑에 매료되었고
하느님 관상에서 안식을 얻고 생기를 얻었으며
하느님의 어지심에 만족하였는데 우리는 무엇에 매료되고 어디에 있습니까?
클라라에게 보물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는데
나에게 보물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성찰케 되는 오늘 클라라 축일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