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아니 지지난주부터 이어지는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주님께서 부질없는 짓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음식에 대해서 얘기하면,
다시 말해서 웰빙Wel being 음식에 대해서 얘기하면 솔깃하겠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얘기하면 ‘이거 죽고 난 뒤의 얘기잖아?’하며
무관심하거나 듣기 싫어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실제로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부자 청년이 달려와 무릎까지 끓고
진지하게 청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법을 알려달라고.
주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젊은이가 있다는 것에
참으로 기분이 좋으셨을 것이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말에도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팔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런 다음 당신을 따르라고 하니 그 젊은이는 떠났습니다.
이 젊은이가 원한 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웰빙이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참된 음료와 참된 음식이 죽고 난 뒤에 유효한 음식이라고 하면
먹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그러해야 합니다.
‘영원히’라는 것이 죽고 난 뒤부터가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히’이어야지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음식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영원이란 영원한 현재이고 그런 영원이어야 하는데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생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현재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현재란 순간이 영원을 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영원과 단절된 순간 또는 찰나를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이 결코 아니지요.
이는 몸에 좋은 음식이 있는데 당장 입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장을 살지
영원을 살려는 의지도 갈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영원을 살려는 의지도 갈망도 없습니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현재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현재와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맛봤다면
이 의지와 갈망이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당장의 좋음에 머물고 심지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고 하십니다.
불교로 말하면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세계를 경험한다면,
영원한 분이신 하느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맛본다면,
지금 이 순간에 영원이 들어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우리는 참으로 좋을 텐데 그것은 언감생심이라고 지레 포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지난주부터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좋은 것이 있다. 그런데
하찮은 것은 탐하면서 참으로 좋은 것은 왜 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한 번 담대하게 도전해보고 그 것을 맛보고 깨달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전 성심당 빵은 줄서서 기다리는데 성당의 빵은 맛도 모르고
맛 들이려고도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