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제가 교만하기 때문일까요?
이 질문이 자신의 부족을 알려는 겸손한 질문처럼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리는 것이 저의 교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이 질문에 앞서 한 질문과 말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묻고,
주님께서 십계명 중의 대인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니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지킬 계명을 다 지켰으니 부족한 것은 없고 완전하지 않느냐는 투입니다.
이렇게 완전하지 않느냐는 투로 얘기하니
주님께서도 완전에 대해서 답을 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가 생각한 완전은 이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완전인데
주님께서는 완전에 대해 완전히 다른 기준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재산을 다 팔라고 하십니다.
완전하려거든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이지만 더 풀이하자면
이 세상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완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것들에 매이면 그것이 어찌 완전하냐는 말씀이고
하여 이 세상에서 필요한 걸 다 가진 게 완전한 게 아니라
이 세상 것들을 다 버릴 수 있어야 완전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나쁜 짓 아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웃에게 나의 것을 다 주는 사랑을 해야만 완전하다는 말씀입니다.
살인, 도둑질, 중상모략, 간음을 안 하는 그런 계명은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이웃과 무관계하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치 않으면서 얼마든지 그런 계명을 지킬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실은 이것이 완전의 최종 기준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줄지라도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완전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이며,
주님을 따르지 않는 포기와 나눔은
그것이 비록 인도적인 사랑의 완성은 될지언정
그리스도교적인 신앙과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을 따를 때 완전하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완전히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름은 그리스도교 완전성의 최종 기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가난과 나눔의 최종 목적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파는 것도 주님을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고,
판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눔도 주님을 완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미혹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모범을 완전히 따르기 위해
우리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완전히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Being)가 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요,
우리의 행위(Doing)가 늘 주님의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완전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완전한 것이 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