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과 자신이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코린토 신자들은 영을 받은 존재들이고,
그것도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 곧 성령을 받은 존재들이라는데
인간은 세상의 영이건 성령이건 외부로부터 영을 받는 존재인가,
아니면 외부의 영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이 됩니다.
말대로라면 다시 말해서 영을 외부로부터 받는다면
내가 원치 않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사람은 세상의 영이건 성령이건
영이라면 어떤 영도 밖으로부터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자기로 똘똘 뭉쳐서 있어서 문을 안으로부터 꼭꼭 걸어 잠그고는
외부로부터는 귀신서건 아무 것도 자기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고
외부의 영과 일체 교제하지 않는 자기의 영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정신/영이 제 정신이고 건강한 영혼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아무 영과도 교제하지 않는 것이
악령 들린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악령 들린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무관심하고 무관계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사랑과 반대되기에 더 나쁜 것인 거처럼 더 나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악령이 들어왔으면 성령도 들어올 수 있는데
문을 꼭 걸어 잠그면 악령뿐 아니라 성령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악령을 쫓아내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주님의 구원행위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떤 영이 외부 영의 방문을 근원적으로 막고
그래서 성령마저 영접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보고도 놀라듯이
그리고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하듯
두려움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악령에 사로잡힙니다.
저는 뱀을 많이 두려워하는데 혼자 깊은 산에 갔을 때 한 번
뱀 생각이 나면 뱀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악령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지만
구원을 찾게 하고 마침내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는데 두려움이 있어도
두려움에 머물지/사로잡히지 말고 즉시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은 사람들이 두려워
문을 꼭 닫아걸고 다락방에 숨어있었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뚫고 들어오시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의 경우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문을 연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들어오시어 열리는 체험을 하고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성령께서 고통마저도 사랑해버리게 하고
죽음마저도 사랑해버리게 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사랑을 알고 사랑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시선을 하느님께 돌려
구원/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고 사랑하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