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바오로 사도가 무슨 망발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다니!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망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잘못 없다는 것이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것입니까?
허물없고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앞뒤 문맥을 보면 자책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책自責한다는 것은 일단은 좋은 뜻입니다.
자기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은데
스스로 자기의 죄 또는 잘못을 꾸짖는 것이니 훌륭하다 아니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너무 자책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적당한 자책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책하는 것은
죄책감罪責感이 없는 것 못지않게 좋은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자책이 지나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죄의 책임責任을 내가 지은 죄 이상으로 지는 것이요,
그러기에 죄 이상으로 자신을 꾸짖으며 죗값을 치르려는 것이고요.
죄책감이 없으면 양심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또 다시 죄를 지을 것이기에 문제라면
지나친 죄책감과 자책은 죄에 짓눌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이 영성적으로 볼 때 일종의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정확한 자기 주제 파악이고 그런 자기 인정이며,
더 나아가서 자기의 선도 긍정하고 죄인인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에 비해 교만은 자기 주제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기에
지나치게 자기를 잘났다고 착각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거나
지나치게 자기를 단죄하는 두 가지 반대 양상으로 나타나지요.
그런데 지나친 자책이 영성적으로 더 문제이고 교만인 이유는
하느님의 판단을 자기가 대신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죄도 용서도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하는데
내가 다 단죄하고 용서함으로써 단죄와 용서의 권한을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년에 인구조사와 병적조사를 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벌을 받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죄를 지을 때는 하느님밖에 있지만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바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이 탄로 났을 때도 다윗은
우리야에게 죄지었다하지 않고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으려고 하였지요.
제 생각에 오늘 바오로 사도가 자책하거나 단죄하지 않겠다고 함도
이런 뜻,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게 하기 위함일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 없이 죄만 내 앞에 있고
주님 앞이 아니라 죄 앞에 내가 있으며
단죄만 있고 용서의 체험이 없는 내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