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 바로 다음 날인 오늘
교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지냅니다.
주님의 모든 축일에 짝을 이루는 성모님의 축일이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축일에 해당하는 성모님의 축일이 없을 수 없겠지요.
이는 아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하신다는 뜻인데
다른 것들은 어머니 마리아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 비해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하심은 성모님이 원해 그리 되신 걸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축일의 짝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우리 교회가 지내는데 성모님께서
‘나는 아들처럼 부패됨 없이 하늘로 오를 거야’하고 오르시지 않았고
그런 축일을 교회가 지내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음에 틀림없지만
하느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리시고 우리 교회가 축일로 지내는 거지요.
그러나 아드님의 십자가 길은 어머니도 분명 원해서 함께 가셨을 것이고
아드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곁에 어머니가 서 계셨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곁에 서 계신 정도가 아니라 같이 매달리셨을 겁니다.
물론 마음으로지요.
그런데 이것은 마치 자기 자녀가 철봉에서 매달리기를 하는데
이제 힘이 빠져 마지막 안간힘을 쓸 때 그것을 보고 있는
엄마도 같이 매달려 몸까지 비틀며 같이 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 또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인데
이렇게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수난受難의 마음이요 수난의 사랑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모든 사랑 실패가 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사랑이 될 텐데
그의 고통보다 그의 잘못이 들어오면 사랑이 미움이 되어 실패키도 하고,
그의 고통이 내 안에 들어오면 공연히 나도 괴로울까봐 아예 보지도 않거나
보더라도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떻게라도 밀어내어 실패키도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할 때
마음이 꿰찔리는 고통을 당할 거라고 시메온이 말한 대로
아들의 오상이 어머니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깊이 박히고
대못이 어머니의 마음에 깊이 박힙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의 길을 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한 처에서 다음 처로 넘어가면서 하는 이 기도를 좋아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그리고 오늘 본기도도 좋아합니다.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린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주님과 함께 수난하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게 하소서.”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이것을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갈망하고
관념적인 예수님의 고통이 아니라
실제로 내 옆에 있는 형제의 고통이 내 마음에 들어오도록
허하겠다는 마음다짐을 다시 해봅니다.
주님, 오늘 형제의 잘못보다 형제의 고통이 내 안에 들어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