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오늘은 복음을 읽어 내려가다가 예수님께서 외치셨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고,
‘위엄 있게 말씀하시면 되지 외치실 것까지 뭐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왜 외치셨고,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 고을에서 많은 군중이 몰려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오늘 주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니
제자들에게는 풀이를 해주지만 일반 군중은 알지 못하게 하려는 거랍니다.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 신비이기에 이 세상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알게 하려고 어머니 사랑을 많이 비유로 들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주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한 말씀인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앞서 봤듯이 모든 사람이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중에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주님께서 설명하셔도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에서부터 관심이 많은 사람까지 다양합니다.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셔도 관심 밖이기에,
다시 말해서 밖에 버리기에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남 차지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비유건 뭐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않겠지만 주님은 그래도 비유를 말씀하신답니다.
쉽게 못 알아듣게 하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인데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알기를 그만두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거지요.
그럼에도 더 알려고 들지 않고 귀한 비유 말씀을 차버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지요.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10,21-2)
그러나 알려는 사람, 배우려는 사람, 곧 제자들에게는 이 비유가
마치 불교의 화두와 같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제자들에게는
스승으로서 친절하게 비유의 뜻을 하나하나 다 풀어주시는데
이는 다음의 주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 22)
하느님 신비에 대한 비유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제자의 자세, 곧 겸손과 열의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우리의 비유는 불교의 화두와 같은 면이 있다고 하였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지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열망과 끈기가 있는
제자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마침내 깨닫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는 어려움이 닥치면 깨닫기를 포기하고 땡중이 되지요.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제자에게는 스승이 필요하고,
겸손과 열망과 끈기도 필요함을 다시 한 번 명심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