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첫 번째 독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우선 그릇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
얼마나 적절하고도 심오한 비유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인간을 표현할 다른 적절한 비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 주님 손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였는데
연필, 종이, 막대기, 몽둥이, 칼, 도마, 빗자루, 쓰레기통, 걸레, 촛불 등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해봤는데
그릇처럼 적절한 비유가 없었습니다.
그릇은 우선 담는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보물을 담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와 똥물을 담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으로 채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갖 쓰레기와 욕심을 비워내고 빈 그릇으로 있습니다.
그릇이란 결국 만족과 공허의 인간 존재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욕심으로 채우면 언젠가는 반듯이
스스로건 다른 사람에 의해서건
비워내야 하는 허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울 때 채워지는 것이 그릇이고
궁극적으로는 보물로 채워지는 만족스런 그릇, 행복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릇은 그릇이로되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니라는 뜻도 되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릇 자체로 고귀한 금으로 된 그릇이나 보석이 박힌 잔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담긴 내용물이 귀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똥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보물을 담고 있다면 다행인데
그릇도 형편없고 담긴 것도 형편없을 수 있고
아예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깨어진 그릇일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 똥 그릇, 보물단지 중에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릇일까요?
보물단지가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똥 그릇은 아닐까요?
욕심으로 차 있다면 어떤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오늘의 야고보 사도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당신처럼 섬기라 하십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섬긴다는 것은 형제들 밑에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형제들을 자기 입맛대로 좋다 나쁘다 평가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그리하여
수난의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에잇,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하고
하인 노릇의 쓰디씀을 뱉어버리지 않고
모든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도 좋고, 저런 형제도 좋다고
어떤 요구를 어떻게 해와도 좋다고
형제들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해 뭐 저런 것이 있어 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님, 나의 보물로 받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질그릇으로 생각하며
그럼에도 귀한 형제들을 모시고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제들을 보물로 여길 때,
내가 형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물로 여길 때
사실은 전에 쓰레기 같던 형제들이 이제 나에게 보물이 되는 것이고
전에 쓰레기더미 가운데 살던 내가
이제 보물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형제를 섬기기 시작하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물을 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며 살 때는 죽음이 자리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죽이니 생명이 질그릇 안에 넘칩니다.
보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우선 그릇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
얼마나 적절하고도 심오한 비유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인간을 표현할 다른 적절한 비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 주님 손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였는데
연필, 종이, 막대기, 몽둥이, 칼, 도마, 빗자루, 쓰레기통, 걸레, 촛불 등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해봤는데
그릇처럼 적절한 비유가 없었습니다.
그릇은 우선 담는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보물을 담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와 똥물을 담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으로 채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갖 쓰레기와 욕심을 비워내고 빈 그릇으로 있습니다.
그릇이란 결국 만족과 공허의 인간 존재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욕심으로 채우면 언젠가는 반듯이
스스로건 다른 사람에 의해서건
비워내야 하는 허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울 때 채워지는 것이 그릇이고
궁극적으로는 보물로 채워지는 만족스런 그릇, 행복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릇은 그릇이로되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니라는 뜻도 되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릇 자체로 고귀한 금으로 된 그릇이나 보석이 박힌 잔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담긴 내용물이 귀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똥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보물을 담고 있다면 다행인데
그릇도 형편없고 담긴 것도 형편없을 수 있고
아예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깨어진 그릇일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 똥 그릇, 보물단지 중에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릇일까요?
보물단지가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똥 그릇은 아닐까요?
욕심으로 차 있다면 어떤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오늘의 야고보 사도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당신처럼 섬기라 하십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섬긴다는 것은 형제들 밑에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형제들을 자기 입맛대로 좋다 나쁘다 평가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그리하여
수난의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에잇,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하고
하인 노릇의 쓰디씀을 뱉어버리지 않고
모든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도 좋고, 저런 형제도 좋다고
어떤 요구를 어떻게 해와도 좋다고
형제들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해 뭐 저런 것이 있어 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님, 나의 보물로 받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질그릇으로 생각하며
그럼에도 귀한 형제들을 모시고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제들을 보물로 여길 때,
내가 형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물로 여길 때
사실은 전에 쓰레기 같던 형제들이 이제 나에게 보물이 되는 것이고
전에 쓰레기더미 가운데 살던 내가
이제 보물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형제를 섬기기 시작하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물을 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며 살 때는 죽음이 자리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죽이니 생명이 질그릇 안에 넘칩니다.
오늘 당쇠 신부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