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어제 마르타와 마리아 얘기 뒤에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복음을 배치한 것은 루카복음의 의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마르타는 종종 기도 또는 관상의 모범으로 얘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말의 영향 때문인지 기도를 뭔가 내가 하는 행위로 이해를 하거나,
행위를 하더라도 듣는 행위가 아니라 말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은 ‘기도하다’ 또는 ‘기도를 하다’와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노래를 하거나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이 행위적으로 쉽게 이해됩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기도를 하면서 청원을 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하면서 명상을 할 수도 있으며
기도를 하면서 자세를 취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기도에 있어서 행위에 중심이나 중요성을 두기 쉬운데
저는 행위에 중요성을 두기보다는 관계에 중요성을 두고 싶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하고,
신뢰와 의탁과 사랑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관계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여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여도 좋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애인일 수도 있고 정배이면 더 좋을 겁니다.
이런 관계일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부복하고만 있어도 됩니다.
어머니이신 하느님 앞에서는 그저 품에 안겨 있어도 됩니다.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는 아버지의 뜻을 같이 실현하기 위해
의논을 해도 좋고 친구이신 주님과는 하고 싶은 얘기 다 해도 좋을 겁니다.
애인이신 하느님과는 당연히 밀어를 나누겠고 어제의 마리아처럼
아무 얘기하지 않고 그저 발치에 앉아 듣기만 하는 것도 사랑이니 좋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뭘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강박적으로 하는 기도를 하느님은 제일 싫어하실 겁니다.
그것은 싫은데 억지로 나온 것이나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 지어내어 하는 말처럼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될 뿐 아니라
그런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엄청 상하실 겁니다.
그런 기도는 진정 하느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고
인간 편에서 그래도 나는 의무를 다했다는
자기 합리화와 위안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관계라고 하였으니
의무로라도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은 요즘처럼
의무도 팽개치고 부모를 찾지 않는 자식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부모에게 하지 않는 의무를 하려는 것은 그나마 칭찬할만한 거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왜 기도하는지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 정도로 위안 삼아도 될까요?
우리는 왜 기도를 하고 배우려고 합니까?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배웁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니 행복한 기도를 하십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