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한 동안 이 말은 마태오 복음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는 말씀과 겹쳐져서 이해되었습니다.
“등불”은 “너희 빛”과 같은 뜻이 되고
“너희의 빛”은 “너희의 착한 행실”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말라는 말씀은
나의 선행,
나의 덕성,
나의 장점,
나의 능력을 감추지 말라는 뜻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전에 저는 저를 자랑하는 것이 될까봐
저의 장점과 능력을 계발하지도 않고
선행과 달란트를 감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달란트를 묻어두었다가 혼이 난 관리인의 비유 말씀을 듣고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나의 달란트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고
더 나아가서 나의 장점도 적극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 나의 선행도 필요하다면 숨기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등불”이나 “너희의 빛”이
과연 저의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말씀을 보면 일단은 그렇습니다.
저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 발의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문을 보면 안 좋은 얘기로 도배되어
어떤 사람은 아예 뉴스를 보지 않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썩을 대로 썩어
도저히 구제불능인 것 같아 너무도 암울한데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한다면
저의 선행이 비록 태양 빛 정도는 못 되도 이런 세상에 등불은 되겠지요.
문제는 선행이 어디서 오느냐,
빛이 어디서 오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發光體인지 反射體인지의 문제입니다.
회광반조(回(廻)光返照)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은 해가 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을 밝히는 것,
또는 꺼지기 전에 마지막 섬광을 터뜨리는 것을 말하지만
선불교에서 이 말은 빛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내면 성찰의 뜻도 되겠지만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빛을 받아야 빛을 내는 존재라는 뜻이 있고,
그러므로 빛을 내기 위해서는
빛을 원천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있는 선,
우리가 실천한 선행,
이것은 모두,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至上 善, 모든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받아 지니게 된 선이요,
선하신 하느님 德에 할 수 있게 된 선행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소회 데레사를 너무 사랑하여
프란치스코와 데레사 영성을 따르는 소화 자매 수녀회를 창설한
김 준호 선생은 프란치스코의 이런 정신을
회광반조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적으십니다.
“달이 스스로 빛이 없지만
태양의 반조로 빛이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는 절대의 지혜와 자비가 없지만
하느님의 德을 채 받으면 지혜의 빛이 반조됩니다.
마치 지구 스스로의 열은 부족하여도
태양의 열을 받은 후에 만물의 생명을 길러낼 수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의 지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여도
성스러운 임의 지혜를 받은 후에 諸德이 완성되어
천지로 더불어 양육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자력의 德과 타력의 德을 합할 때
한 인격이 되나이다.
합심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해와 달 사이의 햇빛과 달빛 같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덕도 똑 같이 완성하게 되나이다.
곧, 큰 빛과 작은 빛이 합할 때 그 빛이 완전해지나이다.”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한 동안 이 말은 마태오 복음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는 말씀과 겹쳐져서 이해되었습니다.
“등불”은 “너희 빛”과 같은 뜻이 되고
“너희의 빛”은 “너희의 착한 행실”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말라는 말씀은
나의 선행,
나의 덕성,
나의 장점,
나의 능력을 감추지 말라는 뜻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전에 저는 저를 자랑하는 것이 될까봐
저의 장점과 능력을 계발하지도 않고
선행과 달란트를 감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달란트를 묻어두었다가 혼이 난 관리인의 비유 말씀을 듣고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나의 달란트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고
더 나아가서 나의 장점도 적극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 나의 선행도 필요하다면 숨기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등불”이나 “너희의 빛”이
과연 저의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말씀을 보면 일단은 그렇습니다.
저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 발의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문을 보면 안 좋은 얘기로 도배되어
어떤 사람은 아예 뉴스를 보지 않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썩을 대로 썩어
도저히 구제불능인 것 같아 너무도 암울한데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한다면
저의 선행이 비록 태양 빛 정도는 못 되도 이런 세상에 등불은 되겠지요.
문제는 선행이 어디서 오느냐,
빛이 어디서 오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發光體인지 反射體인지의 문제입니다.
회광반조(回(廻)光返照)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은 해가 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을 밝히는 것,
또는 꺼지기 전에 마지막 섬광을 터뜨리는 것을 말하지만
선불교에서 이 말은 빛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내면 성찰의 뜻도 되겠지만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빛을 받아야 빛을 내는 존재라는 뜻이 있고,
그러므로 빛을 내기 위해서는
빛을 원천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있는 선,
우리가 실천한 선행,
이것은 모두,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至上 善, 모든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받아 지니게 된 선이요,
선하신 하느님 德에 할 수 있게 된 선행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소회 데레사를 너무 사랑하여
프란치스코와 데레사 영성을 따르는 소화 자매 수녀회를 창설한
김 준호 선생은 프란치스코의 이런 정신을
회광반조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적으십니다.
“달이 스스로 빛이 없지만
태양의 반조로 빛이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는 절대의 지혜와 자비가 없지만
하느님의 德을 채 받으면 지혜의 빛이 반조됩니다.
마치 지구 스스로의 열은 부족하여도
태양의 열을 받은 후에 만물의 생명을 길러낼 수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의 지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여도
성스러운 임의 지혜를 받은 후에 諸德이 완성되어
천지로 더불어 양육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자력의 德과 타력의 德을 합할 때
한 인격이 되나이다.
합심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해와 달 사이의 햇빛과 달빛 같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덕도 똑 같이 완성하게 되나이다.
곧, 큰 빛과 작은 빛이 합할 때 그 빛이 완전해지나이다.”
하느님의 그 크고 충만하신 빛이
저희를 변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으니
저는 감사하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