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구절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보면
조금은 더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이 육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말에서도 그리스도의 육화라고 이야기하지
인화, 사람이 되심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어는 말씀이 육, 살 덩어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예수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슴이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
성경은 왜 굳이 사람이 아니라
살 덩어리가 되셨다고 이야기할까요?
그 이유는 요한 복음 6장의 생명의 빵 이야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야 하는데,
우리의 양식이라는 관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육이 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고 생각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육화는 이미
우리에게 먹히는 것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표현에서
요한은 자신이 즐겨 쓰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머물다'는 단어입니다.
첫 제자들이 된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께 어디에 묵으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요한은 전합니다.
이 외에도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머무르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천막과 관련된 단어인데,
굳이 직역하자면
'천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천막을 치고 머무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만남의 장막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렇기에 천막 안에 머무는 존재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심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그 말씀은
하느님이심을 뜻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먹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되심은
우리의 능력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모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삶에,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받아들이는 자세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원할 때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반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실수하고 좌절할 때,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계에 부딛칠 때,
결국 그분을 찾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통 속에 머물 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용기 내어 손 내밀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보면
조금은 더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이 육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말에서도 그리스도의 육화라고 이야기하지
인화, 사람이 되심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어는 말씀이 육, 살 덩어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예수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슴이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
성경은 왜 굳이 사람이 아니라
살 덩어리가 되셨다고 이야기할까요?
그 이유는 요한 복음 6장의 생명의 빵 이야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셔야 하는데,
우리의 양식이라는 관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육이 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고 생각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육화는 이미
우리에게 먹히는 것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표현에서
요한은 자신이 즐겨 쓰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머물다'는 단어입니다.
첫 제자들이 된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께 어디에 묵으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요한은 전합니다.
이 외에도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머무르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천막과 관련된 단어인데,
굳이 직역하자면
'천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천막을 치고 머무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만남의 장막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렇기에 천막 안에 머무는 존재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심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그 말씀은
하느님이심을 뜻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먹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이 되심은
우리의 능력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모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삶에,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받아들이는 자세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원할 때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반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실수하고 좌절할 때,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계에 부딛칠 때,
결국 그분을 찾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통 속에 머물 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용기 내어 손 내밀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