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과 독서를 관통하면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세 부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적.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대중.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는 늘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자도 예수가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고 있고,
무신론자나 반대파라도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는데
특히 예수님이 처음 등장할 때 이 예수가 누구인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아닌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인지 예수가 메시아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가 누구인지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중요했습니다.
우선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주제파악이 잘 되어 있었고,
달리 말하면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높이지도 그렇다고 낮추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만 잘 알아도 안 되고,
죄인이지만 은총을 많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까지 알아야 하듯
그는 자신이 아닌 것과 자신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무가치하거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메시아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신은 아니지만 신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의 적이 아니고,
내가 신은 아니지만 신성이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도 아니며,
신과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임을 잘 알고 관계 안에서 사는 겁니다.
우선 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 안에 머물며 삽니다.
이는 하느님을 잘 알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로 아는
복음의 악령들과는 달리 하느님 안에 머물며 살아갑니다.
복음을 보면 악령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상관이 없으니 떠나가 달라고,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데
이렇게 아는 거라면 그렇게 아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므로 잘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랑하는 분 안에 머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관계 안에 산다는 것은
자신만 사랑하는 분 안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랑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합니다.
여기서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 포함하는 겁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독점사랑 하지 않고 공동사랑을 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기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역동적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