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조상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율법학자들과 당시의 사람들을 오히려 비판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런 주님을 믿는 우리 가톨릭이 당시 율법학자나 사람들과 다를까?
그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
가톨릭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거룩하다고 하며 성전을 성서보다
더 중요시한다고 과거 개신교의 비판을 받았는데 그와 같은 것은 아닐까?
실제로 우리 가톨릭은 개신교의 비판을 받아도 싼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내세워 마녀사냥이나 이단처형을 하고 십자군을 일으켜
이슬람과 전쟁을 했는데 이런 것들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을까?
제가 어제 경천애인敬天愛人이 주님이 원하시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는 자주 경천한다면서, 곧 하느님을 섬기고 받든다면서
애인, 곧 이웃 사랑하는 것을 팽개치곤 하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인본주의자들처럼 애인을 주장하며 경천을 포기하곤 하여
경천과 애인이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충돌하곤 합니다.
왜 같이 가지 못하고 왜 충돌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참으로 경천하지도 참으로 애인하지도 않기 때문이고
매우 자기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주님을 핑계로 인간을 사랑치 않고
어떤 때는 인간을 핑계로 주님을 사랑치 않는 거지요.
아주 작은 예로 성당에 미사예물이나 주일헌금을 내야 하기에
이웃사랑을 위해 쓸 돈이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웃사랑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니
교회에 낼 돈으로 이웃사랑을 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돈이 없다면 그래서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하느님께는 사랑을 봉헌하고 돈은 이웃사랑을 위해 써도 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자선을 하는 것은 주님도 원하시는 거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두 아들이 수도원에 입회한 어머니가 프란치스코를 찾아왔습니다.
생계를 꾸리던 아들들이 수도원에 들어와 먹고살기도 힘들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베드로 형제에게 공동체에 있는 뭐라도 드리자고 하니
아무 것도 줄 것이 없고 공동체 최초의 신약성서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팔아 요긴한 데에 쓰도록 그 신약성경을 우리의 어머니께 드리시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보다 희사를 하는 것이 훨씬 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 성경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다른 것은 없어도 성경은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렇게 가난한 초기 공동체에 성무일도 독서용 성경만은 있었던 겁니다.
사실 가난을 그렇게 강조한 프란치스코도 “우리는 거룩한 그릇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담고 있는 전례서를 비롯한 다른 전례용품들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고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얘기하는데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것마저 사랑을 위해서라면 없어도 되고 주라고 한 겁니다.
공동체에 성경 없는 것보다 사랑 없는 것이 더 잘못이라는 생각 때문이고,
성경에서 주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프란치스코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과 이런 믿음에 기초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참 사랑이고 주님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따르는 사랑이라면
경천과 애인은 갈등 없이 같이 가는 것임을 또 다시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