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1065 추천 수 0 댓글 0
매일미사 말씀 보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No Attached Image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또 한사람,
즈카르야의 얘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즈카르야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찌 보면 구원의 역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있는 객관자입니다.
그런 객관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구원의 역사에 편입이 되고
그 위대한 역사를 뒤늦게 알고 찬미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고
나중에서야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그의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을 목도하고
즈카르야와 마리아 모두 그 의문을 얘기하는데
어찌해서 마리아는 벌을 받지 않고
즈카르야는 오늘 보듯이 말문이 막히는 벌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는 즈카르야의 물음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마리아의 물음보다 더 불경스럽기 때문일까요?

‘왜?’라는 물음이 말은 같지만 두 가지 ‘왜?’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알려고 들지도 않고
이미 한 행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의도를 모르기에
알기 위해 그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떻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가 행위의 원인적인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행위의 과정적인 의문이고,
왜가 행위의 의도가 무엇이냐의 의문이라면
어떻게는 그런 행위가 어떻게 가능하냐의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능함을 불신하는 ‘어떻게?’와
그것이 가능한 이치를 알고 싶어 하는 ‘어떻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이치를 알고 싶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던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응답을 보면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믿게 될 때까지는 말문이 막힙니다.
불신의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나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싹둑 잘라내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불신의 말은 아예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 불신이 유포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하느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처럼 “I can do it!"이라는 말이 유행인 세상에
“God can do any thing!"
"Impossible is nothing to God"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기 위해서
“어찌 그런 일이?”라는,
불신의 말을 토해 내는 말문은 막혀야 하겠습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말씀 나눔

매일미사 독서와 복음,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글 묵상나눔

  1. No Image 21Dec

    대림 4주일(나해)-어떤 기다림?

    대림 4주일 (나해) 이제 기다림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 대림절을 보내면서 화두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구절을 갖고 기다려왔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으로 나시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
    Date2008.12.21 By이대건 Reply3 Views1302
    Read More
  2. No Image 21Dec

    대림 제 4주일-가슴에 성전, 마음의 구유

    요즘 후레자식은 자기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며 편히 살고 부모는 시골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김치에 시래기 국 먹고 근근이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지만 오늘 1독서의 다윗은 자기는 궁전에 살면서 하느님을 천막에 모시는 것이 여간 ...
    Date2008.12.21 By당쇠 Reply2 Views1227
    Read More
  3. No Image 20Dec

    대림 3주 토요일-수용적 사랑

    오늘은 마리아 차롑니다. 마리아야말로 가장 직접적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맞이하신 분이지요. 이런 비교를 해 보았습니다. 그저께 요셉. 어저께 즈카르야. 오늘 마리아. 두 남자와 한 여자.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완고한 늙은 남자. 나긋나긋한 처녀....
    Date2008.12.20 By당쇠 Reply0 Views1180
    Read More
  4. No Image 19Dec

    대림 3주 금요일-말문이 막혀야!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또 한사람, 즈카르야의 얘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즈카르야도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수님의 아버지가...
    Date2008.12.19 By당쇠 Reply0 Views1065
    Read More
  5. No Image 18Dec

    대림 3주 목요일-하느님의 아드님을 위해 내 아들을

    어제 복음이 주님의 오심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람들을 보았다면 오늘부터 앞으로 성탄 때까지의 복음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요셉의 얘기입니다. 족보로 치면 맨 마지막에 나올 조상, 즉 오실 주님의 아버...
    Date2008.12.18 By당쇠 Reply1 Views1147
    Read More
  6. No Image 18Dec

    대림 3주 수요일-우리는 모두 하느님 구원의 도구들

    오늘은 12월 17일. 주님의 탄생을 한 주일 앞둔 날. 복음은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오래전부터 그 오심을 준비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족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을 대상으로 이 복음을 썼기에 다른 복음에는 없는 이 족보 얘기를 함으로...
    Date2008.12.18 By당쇠 Reply0 Views1211
    Read More
  7. No Image 16Dec

    대림 3주 화요일-실천적 무신론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신론이란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만 실천적 무신론이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이란 그의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은 안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느님 때문에 안 하지 않습니다. 하...
    Date2008.12.16 By당쇠 Reply1 Views1339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 Prev 1 ... 1283 1284 1285 1286 1287 1288 1289 1290 1291 1292 ... 1374 Next ›
/ 1374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