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어가 <열림>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뱀이 하와에게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꾀니
꾐에 넘어간 하와의 눈이 말대로 열리긴 열렸는데
그 열린 눈으로 자기의 수치스러움을 보게 됩니다.
이에 비해 복음의 귀먹어 말을 더듬는 이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명령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말을 듣느냐 그리고 누구의 말을 따르느냐에 따라
이처럼 열리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하와와 아담에게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뱀의 꾀는 말을 듣자 지금까지 누리던 천상세계,
곧 에덴의 낙원/하느님 나라를 포기하고 자기들의 세계로 숨어버립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내쫓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낙원을 포기한 것인데
하느님의 낙원에 있기보다 자기들의 세계를 더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결별하고 하느님과 단절된 그들의 세계는
그들 사이에서도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은 자기/Ego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부끄러운 짓을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짓을 해도 같이 하면 부끄럽지 않습니다.
반대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도 혼자 하면 부끄럽습니다.
혼자 옷을 벗고 있으면 부끄러운데 욕탕에 같이 벗고 있으면 안 부끄럽지요.
옛날 예비군 훈련을 할 때 저희는 의대와 같이 했는데
군복을 같이 입고 있으면 의사가 아니라 예비군/개가 되어
막말을 하고 지휘관이 뭔 얘기를 해도 듣지 않고 개깁니다.
군중심리와 익명성 안에 자기를 숨기기에 부끄럽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옛날 뻔뻔스럽지 않고 순진할 때에는 혼자 하면
좋은 일을 하는 건데도 왠지 부끄러워 선뜻 혼자 나서서 하지 못했지요.
이런 자기Ego가 남과 구분되고 단절된 자기인데
이런 자기의식을 가질 때 내가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자기 안에 숨거나 갇히고 모든 관계는 닫히고 단절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닫히고 단절된 데서 시작된 것이기에
내가 자기를 깨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닫힌 관계는 열리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귀머거리 말더듬이의 귀와 혀가 열린 것은
귀와 혀가 열린 것이 아니라 실은 관계가 열린 것이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자 관계가 열린 것인데
주님께서 열어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부끄러워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숨었는데
그는 자기의 장애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나아가기까지는 그도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숨었었는데
주님은 장애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고쳐주실 분이라고 믿었기에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땅만 보기 마련이고 땅만 보면 더러운 것,
똥 더미가 보이고 똥 더미에 주저앉아 있는 자기를 보고 숨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맑은 하늘을 보면 땅의 똥 더미를 봐도 거기에 주저앉아있지 않고
맑은 하늘처럼 깨끗하게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씻게 됩니다.
우리도 나를 열어 하늘을 보고 하늘의 기운을 받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