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 같은데
그 하느님이 정말 내 생명을 쥐고 계시분이라고 확고히 믿는가?
이 하느님이 나의 생사뿐 아니라 화와 복까지 그러니까
나의 생사화복生死禍福 모두를 쥐고 계시는 분으로 믿는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믿는다면 생사화복까지 쥐고 계시다고
당연히 확고히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생사화복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은
믿어도 손해 볼 것 없고 믿지 않아도 손해 볼 것 없으니 크게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크게 의심을 하지 않기에 믿음이 확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나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 분이라면
하느님이 그런 분인지 그리고 그런 분이 정말로 계시는지
크게 의심을 하고 의심을 통해서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불치병이나 암을 가지고 있어서 생사의 경계에 있고,
내 앞에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의사가 있는데 그의 말을
내가 만일 믿는다면 나의 생사를 그에게 맡길 터이지만
믿지 않는다면 맡기지 않을 거기에 확고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우리는 무척 의심하고 고민하며 신중하겠지요.
오늘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이런 얘기를 왜 오래 했느냐 하면
오늘 복음 말씀이 저에게 이런 고민을 던져줬기 때문이지요.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 내 생사화복이 달렸다고 믿는다면,
나뿐 아니라 나의 가족의 생사화복도 주님께 달렸다고 믿는다면
가족이나 토지를 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를 버리는 것도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고 나와 가족의 생사화복까지 쥐고 계시는 분을 위해
내 생명과 가족을 내가 버린다 해도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백배로 또 주시고 오늘 집회서 말씀대로 일곱 배로 갚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그렇다고 돈 몇 푼이나 제물을 뇌물로 바치지도 말라 하십니다.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여기서 또 생각게 됩니다.
제물과 뇌물의 차이가 뭣인지.
땀의 정당한 결실을 바치면 제물이고 착취한 것을 바치면 뇌물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면 제물이고 이익을 얻기 위해 바치면 뇌물이며,
사랑으로 바치면 제물이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바치면 뇌물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많은 미사예물은 제물입니까, 뇌물입니까?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해 나를 바치려는 마음은 없이
그저 돈 몇 푼 바치며 백배로 달라고 하니 뇌물입니까?
연미사든 생미사든 나를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치는 것이니 제물입니까?
사랑 없이 욕심으로 바치면 뇌물이요,
욕심 없이 사랑으로 바치면 제물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제물에 대한 순결함을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