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평화를 빕니다.
저는 몇년전 서울에서 소임으로 있을 때에
가끔씩 명동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곤
하였습니다. 이유는 당연이 하느님께 기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도 전 여느때와
같이 성당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바로 제 뒤에 노숙자분이 앉아서 울면서 통곡
을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성당 분위기는
시끄럽게 되었고 전 시끄러운 분위기에서도
기도를 할려고 하였지만 분심이 들어서 기도를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참다 못해
뒤를 돌아보면서 째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노숙자분은 달라짐없이 계속해서
울면서 "나는 암브로시오야, 암브로시오~~!!"
그렇게 해서 한20분정도 울고 계시다가 성당
관리자분에 의해서 끌려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전 이제야 됐다 싶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찰나에 갑자기 제 머리
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쳐지나감은 저로 하여금 일명"멘붕"에 빠지게
했고 제 수도생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스쳐지나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난 기도하러
명동성당에 왔고 예수님을 뵈러 성체조배를 하고
있고 예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정작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 예수님을 뵈러 성당에 왔지만 정작
제 뒤에 계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 예수님을 만나뵈러 성당에 왔지만 가난한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 한참동안 스스로에게 질문을던졌습니다.
"왜,,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단지 기도생활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었습
니다. 바로 형식과 틀에 갇힌 기도였던 것이었습
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러왔지만 저의 기도때문에
예수님께 기도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뵈러 왔지만
저의 기도만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이 기도생활을
위한 기도를 하니 제 기도에 방해가 되었던 그
노숙자분에게 전 화가 났던것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는 단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부분에서는 단식만을 위한 단식에 대해서 말씀
을 하십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은 하느님을 위한 단식, 하느님께
나아가기위한 단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것,,,"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
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단식을 위한 단식을 하는 그들이라면 이렇한 질
문을 하는것은 어찌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식의 진정한 의미가 단식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
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것이라면 예수님과 제자
들은 굳이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하십니다."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
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그러
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저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물만 마시는 물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10일정도 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서 기도만을 위한 기도가 되지 않고 단식만을 위한
단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몇년전 서울에서 소임으로 있을 때에
가끔씩 명동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곤
하였습니다. 이유는 당연이 하느님께 기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도 전 여느때와
같이 성당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바로 제 뒤에 노숙자분이 앉아서 울면서 통곡
을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성당 분위기는
시끄럽게 되었고 전 시끄러운 분위기에서도
기도를 할려고 하였지만 분심이 들어서 기도를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참다 못해
뒤를 돌아보면서 째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노숙자분은 달라짐없이 계속해서
울면서 "나는 암브로시오야, 암브로시오~~!!"
그렇게 해서 한20분정도 울고 계시다가 성당
관리자분에 의해서 끌려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전 이제야 됐다 싶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찰나에 갑자기 제 머리
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쳐지나감은 저로 하여금 일명"멘붕"에 빠지게
했고 제 수도생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스쳐지나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난 기도하러
명동성당에 왔고 예수님을 뵈러 성체조배를 하고
있고 예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정작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 예수님을 뵈러 성당에 왔지만 정작
제 뒤에 계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 예수님을 만나뵈러 성당에 왔지만 가난한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 한참동안 스스로에게 질문을던졌습니다.
"왜,,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단지 기도생활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었습
니다. 바로 형식과 틀에 갇힌 기도였던 것이었습
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러왔지만 저의 기도때문에
예수님께 기도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뵈러 왔지만
저의 기도만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이 기도생활을
위한 기도를 하니 제 기도에 방해가 되었던 그
노숙자분에게 전 화가 났던것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는 단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부분에서는 단식만을 위한 단식에 대해서 말씀
을 하십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은 하느님을 위한 단식, 하느님께
나아가기위한 단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것,,,"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
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단식을 위한 단식을 하는 그들이라면 이렇한 질
문을 하는것은 어찌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식의 진정한 의미가 단식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
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것이라면 예수님과 제자
들은 굳이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하십니다."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
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그러
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저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물만 마시는 물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10일정도 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서 기도만을 위한 기도가 되지 않고 단식만을 위한
단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