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어제 참된 단식이란 식욕뿐 아니라 모든 욕심을 버리는 것이요,
더 적극적으로는 제 욕심 차리기 대신에 자선을 실천하는 것임을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렇게 할 때 다시 말해서 불의를 멈추고,
사랑을 실천할 때 개인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나게 됨을 얘기하고,
우리가 만약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성벽을 고쳐쌓는 이’,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고 일컬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릇 신앙인이라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은 특히 더 그래야 하는데
사람을 쓰러뜨리고, 무너뜨림으로써 교회/성전을 파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을 똑바로 세우고 그럼으로써 억울한 사람을 살려야 할 법조인들이
사법살인을 하듯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성전을 파괴한 것입니다.
법이 하느님의 법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권한이 하느님의 사랑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권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준이랄까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가 되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인으로 단죄하고
단죄 받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쫓아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사가 잘못 진단을 하면 의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의사가 진단만 하고 고쳐주지 않으면 의사라 할 수 있을까?
고쳐주진 않고 전염병이니 내쫓아야 한다고만 하면 그런 사람도 의사일까?
그런데 다행이도 우리 주님은 이렇게 쫓겨나거나 스스로 밀려나
공동체 밖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의사는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고,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 시키러 왔다.”라고도 하십니다.
어제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한 분 자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연세도 많으시고 몸과 마음도 성치 않아 찾아뵌 것인데
제가 당신을 찾아오게 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좋을 때는 찾지 않고 어려울 때만 찾아서 죄송하다면서
‘신부님, 어려울 때는 신부님 생각만 나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제게 지으셨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딱 한 사람이라는 것이 제게는 영광입니다.’
사실 한 사람일지라도 어려울 때 그 한 사람에게
생각나는 딱 한 사람이 된다면 저라는 존재는 필요한 존재이고
저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그런 분이지요.
보통 때는 생각나지 않다가 어려울 때면 생각나는 분 말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어려울 때 생각나고 같이 있어주는 분이기는 하지만
엄마도 그 어려움에서 나를 꺼내줄 수는 없을 때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또 다행이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꺼내주시고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며 나뿐 아니라 세상을 구해주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저의 구원자시고 구세주시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께 죄송합니다.
좋을 때는 생각나지 않다가 꼭 어려울 때만 생각나고 매달려서.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구원자
저의 전부시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