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순 5주의 끝인 금요일에 와있고
사순시기도 그러니 끝자락에 와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점차 죽음을 향해 가십니다.
거듭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가 이 세상에 왔다고
하니 어제 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마귀 들렸다고 하던 사람들이
급기야 오늘 10장에서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이 신성모독의 말이 아니라
참/진리를 말씀하시는 거라는 뜻으로 이렇게 답하십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다.”
지난달 영명축일 미사 때 축하객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며
물과 포도주를 섞는 예절을 제가 소리 내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라고 소리 내어 기도한 겁니다.
그랬더니 미사가 끝난 뒤 한 자매님이 물과 술을 섞는 것이
인성과 신성이 합쳐지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수없이 이 부분을 소리 내어 미사 드리고 또 강의 때 설명하였어도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분이 많지 않았는데
이 자매님은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신 겁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이 이분처럼 이 의미를 잘 알아듣고
신자로서의 자부심도 갖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람들은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려 하면서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가 신성에 참여케 됐으니 우리도 신적 자부심을 가지고 살자는 거지요.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안 되지만
주님처럼 하느님으로 자처하면 된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이니까요.
自處자처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면 ‘스스로 자리매김함’이 되는데,
우리가 자신을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 자리매김하고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면 이때의 자처는
아들도 아닌 것이 아들로 자처하는 교만이나 위선이 아니라
참으로 아들답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잘 실천하는 것이고,
아들이 되어가지고 아비의 얼굴을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효성스러움이 되는 것이지요.
실로 저를 포함하여 많은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를 자처하고,
특히 많은 정치가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면서
천주교 신자답게 또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남들이 볼까봐 성호를 긋지 못하거나
천주교 신자임을 감추는 사람보다 낫다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하느님을 무지 욕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것은
필리비서 2장이 얘기하는 바로 그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주님께서 굳이 하느님과 동등함을 고집치 않고
종의 신분을 취하고 인간이 되셔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니
성부께서 그런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리셨다고 필리비서가 얘기하듯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들어 실천할 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 아드님의 신성에 참여케 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의 참 뜻임을 깨달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