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는 계속되는 야훼의 종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제 얘기는 야훼의 종의 사랑 얘기였다면
오늘은 야훼의 종의 소명의 사랑과 순명의 사랑에 대한 얘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야훼의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시고
야곱의 열두 지파와 이스라엘의 남은 생존자뿐 아니라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는 소명을 주시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자 야훼의 종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야훼의 종이나 주님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소명에 순명하여
온힘 쏟았지만 헛고생만 하고 허무/허망한 것에 헛심을 썼다는 느낌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심란하시고,
심란하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고뇌하셨듯이 죽음을 코앞에 둔 심란함입니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죽음에 대한 마음의 대비를 진즉부터 해왔더라도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마음이 어떨까?
무척 심란할 것이고, 적어도 담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은 이렇게 죽음 앞에서 무척 당황하고 혼란스럽겠지만
오늘 주님의 심란함은 이런 우리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란하신 것은 제 생각에 제자들의 배반 때문입니다.
유다의 배반은 그렇다 치더라도 베드로마저 당신을 모른다 할 것이고,
나머지 제자들도 당신을 버려두고 다 도망쳐버릴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 교육이 다 헛것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저는 오랫동안 양성책임을 하였기에 이럴 때의 심정을 얼마간 압니다.
우리의 영성을 그렇게 강조하여 얘기했고 그때는 알아듣는 것 같은데
몇 년 지나서 보면 형제들에게 그것은 이빨도 안 들어간 거였습니다.
먹어서 소화되고 체화되기를 바라는데 이빨도 안 들어간 거였고
어떤 때 오히려 제 가르침이 잘못 됐다고 하며 반대되는 주장까지 할 때는
내가 이러라고 가르쳤나 하며 회의감이 들면서 헛심 썼다는 느낌이 들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다 제 욕심 때문입니다.
내가 한 것이 성과를 내고 그래서 내가 영광 받기를 바라는 욕심 말입니다.
스승님이 가르치신 덕분에 일생일대의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거나
더 나아가 사람이 되었다는 제자의 얘기를 듣고 싶은 거지요.
심지어 기도할 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 기도해준 사람이 병이 낫거나 일이 잘 되었을 경우
그가 잘 된 것 때문이 아니라 저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 때문에 기뻐하는데,
그런 저를 보고 깜짝 놀라 기도도 정화해야겠다면서 기도의 정화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도 정화가 필요하고,
사랑도 정화가 필요하고, 소명의 완수에 있어서도 정화가 필요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정화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허사체험은
스스로 정화를 못한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 마련하신 정화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야훼의 종의 허무 느낌과 주님의 심란함은
우리가 느끼고 우리에게 필요한 허무체험과 같은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이 아니라 철부지를 놔두고 떠나는 부모의 심정일 겁니다.
요즘 나이 먹어 부모에게 얹혀사는 자식이 많다는데 그런 부모의 걱정처럼
주님도 한심한 제자들과 우릴 보고 심란해하실 거기에 자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