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의 엘리야와 엘리사는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드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는데 비해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스승의 뒤를 이어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얼토당토 않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제게도 엘리사 같은 제자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그리 된다면 제 인생도 성공한 인생일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에게 제자가 있다는 것은
제자가 본받고 따르고 싶을 만큼 제가 잘 살았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그런 생각이 얼토당토 않는 이유가
제가 먼저 스승을 따르는 삶을 잘 살아야 저를 따를 제자도 있는 법인데
나는 스승을 모시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면서
누군가 나를 따르는 제자가 있기를 바라니 말입니다.
이런 저를 볼 때 오늘 복음의 그 어떤 주님 추종자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길가는 주님께 와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적지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목적지를 자기 혼자 가든지 가는 길을 잘 모르면
그곳을 잘 아는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고 하니 자기 목적지는 없고
주님이 자기의 목적지요 주님 가시는 곳이 자기 목적지라는 거지요.
우리 교회를 들여다보면 신자들 중에 자기의 유익이 되면
교회를 이용하다 유익될 것이 없거나 불이익이 예상 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도
진정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필요 때문에 주님을 따르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낟 뒤에는 주님을 차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추종이 아니라 이용입니다.
그러나 애인의 경우 애인이 자기 있을 곳이고 어린이의 경우 엄마가 자기
있을 곳이듯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의 목적이고, 주님과 함께 가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따르라는 얘기는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이
가시는 곳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기에 당신을 따르면 고생이라 하십니다.
이는 남녀가 가진 것도 없고 아무런 부모의 도움도 없이 결혼하게 될 때
남자가 여자에게 나하고 결혼하면 고생이 불보듯뻔한데 그래도 나만 믿고
결혼하겠냐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따르는 것을 불허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런 자발적인 추종자에 비해 주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따르라 하십니다.
그러자 초대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하는데
이에 주님께서는 장례 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즉시 따르라고 하십니다.
인륜지사와 인지상정을 초월하는 추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인간의 일 중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이고,
이 중대지사를 소홀히 하는 것은 패륜아나 하는 짓인데 그걸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님께서 실제로 요구하셨을까 의문이 들 정도인데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인륜지사와 인지상정을 무시하신 게 아니라
주님을 따름은 인간의 그 어떤 중요한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인 겁니다.
세 번째 경우도 어떤 사람이 먼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작별인사를
하고 따르겠다고 하니 주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는 필리비서의 다음 말씀,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2, 13)를 상기시킵니다.
과거지향적이지 말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앞뒤 정렬을 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하느님 나라를 앞에 두고 세상과 세상사를 뒤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다 앞을 놓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 명심하는 오늘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에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구도자분들의 독방의
고독을 떠올려 봅니다.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고독을 견딜 수 있음이 인간 성숙의 척도가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고독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홀로, 앞서 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이 가는 길에 조언해 줄 사람이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고 앞서 걸어가야 하는, 이것이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고 주님이 가신 길이라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길이 되어 줄 수는 있어도 제자들은 주님과
수평적으로 나눌 대상은 될 수가 없었다는 것...
세속에 사는 저도 때때로 누구에게도 상의 할 수 없는 ,
누구도 채워 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낄 때, 이런 느낌이 고독일까!..
어렴풋이 떠올려 보며 아~ 그래서 옛 성인들이 하느님께 마음을
둘 수밖에 없었나...싶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오늘은 교황 주일이라는 전례가 말해 주듯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구도자분들의
삶을 통해 교회 안에 전통으로 전해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 옵니다. 그러니 구도자분들의 존재자체가
저에게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 둘 곳 없었던 주님을 마음으로 그리며 오늘도 덕의 그늘을 펼치는
구도자분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덕이 드리우는 그늘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앞뒤 정렬을 잘해야 한다는 말씀”
을 명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관상적인 받아들임)
http://www.ofmkorea.org/106395
16년 연중 제13주일
(안주를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닌가?)
http://www.ofmkorea.org/90757
15년 연중 제13주일
(믿음이란 허용과 수용이다.)
http://www.ofmkorea.org/79226
13년 연중 제13주일
(나의 경우는?)
http://www.ofmkorea.org/54683
12년 연중 제13주일
(지푸라기에도 믿음을 두듯)
http://www.ofmkorea.org/32073
10년 연중 제13주일
(주님을 따르려면)
http://www.ofmkorea.org/4158
09년 연중 제13주일
(죽음은 삶을 밝혀주는 것일 뿐!)
http://www.ofmkorea.org/2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