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성삼일 전례를 계획하면서
큰 주제를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어져 있었다.”로 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가 머무는 무덤은 막힌 곳이라는 뜻이 있고
氣가 막히고 코가 막히면 죽듯이 뭔가로 꽉 막힌 자는
그 막는 것으로 인해 죽게 된다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이번 부활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돌,
사람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는 돌,
사람과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는 돌을 치우자는 뜻입니다.
어제 식탁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구별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얘기의 발단은 제가 반쯤 먹은 풋고추를
식탁 위에 놨다 다시 먹는 것을 보고
왜 접시 위에 놨다가 먹지 식탁 위에 놨다고 먹느냐고
누가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오늘 강론을 준비 중인 저는 즉시
왜 식탁과 접시를 구별하느냐,
왜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하느냐 농담 삼아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같은 좌석의 다른 형제께서
자기는 얼마 전까지 발 닦는 수건과 얼굴 닦는 수건을 구별하였는데
왜 같은 나의 몸인데 발과 얼굴을 구별하는지 성찰케 되었고
이제는 그래서 같은 수건으로 발과 얼굴을 닦는다고 얘기하였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놀랍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수건과 얼굴수건을 구별하여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별이 많은 불행의 근원입니다.
무엇을 더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순간,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에 비해 악이 되고
그 사람은 그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볼 때
구별이 악의 출발입니다.
모든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밉게 보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천하게 여기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필요 없다 버리는 순간, 그것은 쓰레기 악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선이 되지 못하고
그 중 어떤 것이 악이 되는 순간,
그것만 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것도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것보다 좋은 것은
언젠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나쁜 것이 되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보통의 우리들을 대변합니다.
발을 더럽게 여기고
더러운 발을 추하고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악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악으로까지 여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얼굴처럼 소중히 가꾸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발톱에 매니큐어를 화려하게 칠한 사람을 보고
속으로 ‘별꼴이야!’하다가 오늘 복음을 생각하며
‘발도 얼굴처럼 소중히 가꾸는 사람이구나!’하며
시선 변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선 변경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부끄럽게 여긴 발을 소중히 여기시고,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시선 변경을 해야 합니다.
발이 더럽긴 해도 얼굴보다 수고가 더 많지 않습니까?
온 몸을 감당하느라 너무 피곤하고 더러워지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멸시까지 받으니
얼마나 수고가 많고 고통이 큽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 발과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 많고 힘이 있고 능력도 많아서
어디서나 환영을 받고
그래서 어디나 당당하게 나서는 사람들에 비해서
사람들이 기피하고 그래서 어느 공동체,
심지어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3 D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피하는 온갖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
우리가 더럽다고 피하는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
우리가 위험하다고 피하는 온갖 위험한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피하는 일을 이 분들이 다 하는데
우리는 이 분들을 고맙고 소중히 여기지는 못할 망정
우리보다 못하니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 나아가서 우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 코린토 전서 11장은
차별이 있었던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깨우침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만찬을 기념하여
주님의 날에 각기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회당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에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는 이 성찬례가
언젠가부터 그 의미는 퇴색되고
부자들끼리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먹는 자리로 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배불리 먹고 취할 정도로 거나하게 먹지만
아무 것도 가져올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회당 밖에서 예절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렇게 차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혀 갈라진 코린토 교회에
바오로 사도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음으로
그것을 같이 먹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자문해봅시다.
우리는 코린토 교회의 성도들과는 달리 모두 한 형제입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 따라 모두 한 형제입니까?
한 형제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고 갈라놓는 구별과 차별의 돌을 치웁시다.
한 형제라면
움켜 쥔 손을 펴고 형제들과 나눕시다.
한 형제라면
우리를 위해 더러워지고 고단한 형제의 발을 씻어 줍시다.
큰 주제를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어져 있었다.”로 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가 머무는 무덤은 막힌 곳이라는 뜻이 있고
氣가 막히고 코가 막히면 죽듯이 뭔가로 꽉 막힌 자는
그 막는 것으로 인해 죽게 된다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이번 부활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돌,
사람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는 돌,
사람과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는 돌을 치우자는 뜻입니다.
어제 식탁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구별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얘기의 발단은 제가 반쯤 먹은 풋고추를
식탁 위에 놨다 다시 먹는 것을 보고
왜 접시 위에 놨다가 먹지 식탁 위에 놨다고 먹느냐고
누가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오늘 강론을 준비 중인 저는 즉시
왜 식탁과 접시를 구별하느냐,
왜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하느냐 농담 삼아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같은 좌석의 다른 형제께서
자기는 얼마 전까지 발 닦는 수건과 얼굴 닦는 수건을 구별하였는데
왜 같은 나의 몸인데 발과 얼굴을 구별하는지 성찰케 되었고
이제는 그래서 같은 수건으로 발과 얼굴을 닦는다고 얘기하였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놀랍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수건과 얼굴수건을 구별하여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별이 많은 불행의 근원입니다.
무엇을 더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순간,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에 비해 악이 되고
그 사람은 그 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볼 때
구별이 악의 출발입니다.
모든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밉게 보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대하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천하게 여기는 순간, 그것은 악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중 어떤 것을 필요 없다 버리는 순간, 그것은 쓰레기 악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선이 되지 못하고
그 중 어떤 것이 악이 되는 순간,
그것만 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것도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것보다 좋은 것은
언젠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나쁜 것이 되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보통의 우리들을 대변합니다.
발을 더럽게 여기고
더러운 발을 추하고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악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악으로까지 여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얼굴처럼 소중히 가꾸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발톱에 매니큐어를 화려하게 칠한 사람을 보고
속으로 ‘별꼴이야!’하다가 오늘 복음을 생각하며
‘발도 얼굴처럼 소중히 가꾸는 사람이구나!’하며
시선 변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선 변경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부끄럽게 여긴 발을 소중히 여기시고,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시선 변경을 해야 합니다.
발이 더럽긴 해도 얼굴보다 수고가 더 많지 않습니까?
온 몸을 감당하느라 너무 피곤하고 더러워지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멸시까지 받으니
얼마나 수고가 많고 고통이 큽니까?
그런데 우리 주변에 발과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 많고 힘이 있고 능력도 많아서
어디서나 환영을 받고
그래서 어디나 당당하게 나서는 사람들에 비해서
사람들이 기피하고 그래서 어느 공동체,
심지어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3 D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피하는 온갖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
우리가 더럽다고 피하는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
우리가 위험하다고 피하는 온갖 위험한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피하는 일을 이 분들이 다 하는데
우리는 이 분들을 고맙고 소중히 여기지는 못할 망정
우리보다 못하니까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 나아가서 우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 코린토 전서 11장은
차별이 있었던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깨우침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만찬을 기념하여
주님의 날에 각기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회당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에서는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는 이 성찬례가
언젠가부터 그 의미는 퇴색되고
부자들끼리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먹는 자리로 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
배불리 먹고 취할 정도로 거나하게 먹지만
아무 것도 가져올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회당 밖에서 예절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렇게 차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혀 갈라진 코린토 교회에
바오로 사도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음으로
그것을 같이 먹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자문해봅시다.
우리는 코린토 교회의 성도들과는 달리 모두 한 형제입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 따라 모두 한 형제입니까?
한 형제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고 갈라놓는 구별과 차별의 돌을 치웁시다.
한 형제라면
움켜 쥔 손을 펴고 형제들과 나눕시다.
한 형제라면
우리를 위해 더러워지고 고단한 형제의 발을 씻어 줍시다.
잘 묵상하고 다른 깊이 있는 나눔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