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탈북자를 만났습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용인 즉,
하나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데다
머물 집을 배정받지 못해서
구청 복지관 사무실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데
거처와 먹고 살 일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움 받기 위한 수사인 줄 알고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는데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혼자 살기에 믿는다고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신부, 수녀는 사기치거나 사람을 이용해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신부, 수도자를 보면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애라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린이 사랑의 단계가 있고
결혼을 하고 자기 새끼들 밖에 모르는,
내리사랑의 단계가 있으며
나이를 더 먹어 부모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는,
치사랑의 단계가 있고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도 사랑하는,
형제적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편지에서 요한은 이 면에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로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 사랑의 단계에 올라가야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야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듯
사랑도 하느님 사랑의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야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이 눈에 들어오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집부리고
자기 가족 밖에 몰라 자기 것을 절대로 내놓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공동 소유로 내놓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같이 소유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같이 받들어
무엇을 하든 한 뜻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형제들로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고
서로 옳다고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시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이 원하시고 빌어주시는 평화는
개인의 내적인 평화 뿐 아니라
우리 모두 화목하게 지내는 관계적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 즉
이 무소유와 평화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용인 즉,
하나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데다
머물 집을 배정받지 못해서
구청 복지관 사무실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데
거처와 먹고 살 일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움 받기 위한 수사인 줄 알고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는데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혼자 살기에 믿는다고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신부, 수녀는 사기치거나 사람을 이용해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신부, 수도자를 보면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 만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애라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습니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린이 사랑의 단계가 있고
결혼을 하고 자기 새끼들 밖에 모르는,
내리사랑의 단계가 있으며
나이를 더 먹어 부모의 사랑을 헤아리고 효도하는,
치사랑의 단계가 있고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도 사랑하는,
형제적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편지에서 요한은 이 면에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로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 사랑의 단계에 올라가야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야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듯
사랑도 하느님 사랑의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야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이 눈에 들어오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집부리고
자기 가족 밖에 몰라 자기 것을 절대로 내놓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공동 소유로 내놓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같이 소유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같이 받들어
무엇을 하든 한 뜻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이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형제들로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고
서로 옳다고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시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이 원하시고 빌어주시는 평화는
개인의 내적인 평화 뿐 아니라
우리 모두 화목하게 지내는 관계적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 즉
이 무소유와 평화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