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오늘 하늘로 오르십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시냐고
주님의 승천을 원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가신 것도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떠나 가셨지만
우리에게 뭔가를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무릇 모든 떠남은 남는 사람에게 뭔가를 남깁니다.
상처를 남기고
회한을 남기고
갈등을 남기기도 하고
유언을 남기고
유산을 남기고
가르침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해 돌아가신 김 수환 추기경은 무엇을 남겼고
어제 세상을 떠난 노 무현 전 대통령은 무엇을 남겼으며
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무엇을 남기고 떠나게 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나셨을까요?
한마디로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하셨던 그 사랑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가 모두 사랑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사랑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일까?
自己中心性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맘에 맞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자기 맘에 맞는 좋은 사람을 사랑하려 하다가
愛와 憎이 교차하는 사랑을 합니다.
며칠 전 정말 마귀의 장난처럼 누가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하긴 했지만 전에도 했던 잘못이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지지 않고 점점 더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가끔 활용하는 ‘극단의 가정법’을 적용했습니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 이까지 것 가지고 내가 미워할까?”
그 어떤 것도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 어떤 것 때문에 그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면
그 어떤 것이 죽음보다도 나쁜 정말로 대단한 악이던지
내가 정말 잘못 되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저의 경우, 이렇게 ‘극단의 가정법’을 적용하면
이 세상사 어떤 큰 문제도 작은 문제가 되면서
비교적 쉽게 초월하게 됩니다.
노 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생을 놓을 줄 알았으면
아마 관계자들의 대응도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선을
주님께서 앞서가신 하늘로 향하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월의 시선으로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행복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
죄악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삶의 목적도 잃고 꿈도 잃은 불쌍한 사람들,
가난과 병고의 그 절박함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들,
이런 어려움 중에 있어도 아무의 격려를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왜 내 맘에 들지 않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느냐고 요구하지 말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찾아가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위로하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면서 남기신 것이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뜻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시냐고
주님의 승천을 원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가신 것도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떠나 가셨지만
우리에게 뭔가를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무릇 모든 떠남은 남는 사람에게 뭔가를 남깁니다.
상처를 남기고
회한을 남기고
갈등을 남기기도 하고
유언을 남기고
유산을 남기고
가르침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해 돌아가신 김 수환 추기경은 무엇을 남겼고
어제 세상을 떠난 노 무현 전 대통령은 무엇을 남겼으며
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무엇을 남기고 떠나게 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나셨을까요?
한마디로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하셨던 그 사랑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가 모두 사랑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사랑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일까?
自己中心性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맘에 맞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자기 맘에 맞는 좋은 사람을 사랑하려 하다가
愛와 憎이 교차하는 사랑을 합니다.
며칠 전 정말 마귀의 장난처럼 누가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하긴 했지만 전에도 했던 잘못이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지지 않고 점점 더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가끔 활용하는 ‘극단의 가정법’을 적용했습니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 이까지 것 가지고 내가 미워할까?”
그 어떤 것도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 어떤 것 때문에 그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면
그 어떤 것이 죽음보다도 나쁜 정말로 대단한 악이던지
내가 정말 잘못 되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저의 경우, 이렇게 ‘극단의 가정법’을 적용하면
이 세상사 어떤 큰 문제도 작은 문제가 되면서
비교적 쉽게 초월하게 됩니다.
노 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생을 놓을 줄 알았으면
아마 관계자들의 대응도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선을
주님께서 앞서가신 하늘로 향하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월의 시선으로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행복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
죄악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삶의 목적도 잃고 꿈도 잃은 불쌍한 사람들,
가난과 병고의 그 절박함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들,
이런 어려움 중에 있어도 아무의 격려를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왜 내 맘에 들지 않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느냐고 요구하지 말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찾아가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위로하고
이제 주님 대신 그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면서 남기신 것이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뜻입니다.
잘못을 하긴 했지만 전에도 했던 잘못이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지지 않고 점점 더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가끔 활용하는 ‘극단의 가정법’을 적용했습니다.
“만일 그가 죽는다면 이까지 것 가지고 내가 미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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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르 8,36)
죽음 택한 것은 잘못 된 일이지만, 신앙안에서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