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형제와 대화를 하는 중에 그가 하는 말이,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현상은 요즘 사람들이 점점 독해져간다는 것입니다.
길에 나가면 요즘 청소년 아이들의 말이 매우 거칩니다.
누가 있건 없건, 어른이 있어도
그리고 친구들끼리 대화인데도 쌍욕을 입에 달고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어른들도 익명성을 등에 업고
증오가 가득 담긴 모진 소리들을 함부로 합니다.
그 바람에 자살로 내몰린 연예인들처럼 자살자들이 생기는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이 독한 사회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여
도태되거나 낙오하는 노숙자들이 생기기도 하고
가상공간 외에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폐적으로 살다가 똑같이 독한 사람이 되어
연쇄살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독해졌을까요?
얼마나들 아플까요?
독한 말에 당한 사람도 매우 아프겠지만
독한 말을 퍼부은 사람은 더 아플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주기 전에 그것을 품고 있는 동안
스스로에게 더 많은 상처를 입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스로에게 더 많은 상처를 입히지 않았으면
그렇게 독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움이든 사랑이든 먼저 자기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분노든 화이든 자기를 먼저 괴롭히지 않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 참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 분노이고
약이 오르고 올라 점점 독해지는 것이 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어찌 보면 더 불쌍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상처 입지 않고 남만 상처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은 남에게 상처 주기 전에 자기가 먼저 상처를 입는 법인데
이런 사람은 맹독성 독사와 같이
남에게는 치명상을 입히면서도 자기는 문제없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념으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거나
종교적 신념으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거나
정의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사랑보다 우선합니다.
자기의 이념이나 종교 신념만이 옳고 자기만 정의롭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은 틀려먹은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이기에 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째가는 계명을 수없이 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이어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정혜결사를 주도했던 보조지눌의 가르침입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만든다.”
같은 물을 마시는데도
뱀은 남을 해치는 독을 만들어 내고
소는 남을 살리는 젖을 만들어 냅니다.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을 같이 들어도
뱀과 같은 사람은 그 말로 상대를 해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사랑한다고 할 것입니다.
뱀도 뱀은 사랑하고 자기 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현상은 요즘 사람들이 점점 독해져간다는 것입니다.
길에 나가면 요즘 청소년 아이들의 말이 매우 거칩니다.
누가 있건 없건, 어른이 있어도
그리고 친구들끼리 대화인데도 쌍욕을 입에 달고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어른들도 익명성을 등에 업고
증오가 가득 담긴 모진 소리들을 함부로 합니다.
그 바람에 자살로 내몰린 연예인들처럼 자살자들이 생기는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이 독한 사회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여
도태되거나 낙오하는 노숙자들이 생기기도 하고
가상공간 외에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폐적으로 살다가 똑같이 독한 사람이 되어
연쇄살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독해졌을까요?
얼마나들 아플까요?
독한 말에 당한 사람도 매우 아프겠지만
독한 말을 퍼부은 사람은 더 아플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주기 전에 그것을 품고 있는 동안
스스로에게 더 많은 상처를 입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스로에게 더 많은 상처를 입히지 않았으면
그렇게 독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움이든 사랑이든 먼저 자기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분노든 화이든 자기를 먼저 괴롭히지 않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참고 참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 분노이고
약이 오르고 올라 점점 독해지는 것이 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어찌 보면 더 불쌍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상처 입지 않고 남만 상처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은 남에게 상처 주기 전에 자기가 먼저 상처를 입는 법인데
이런 사람은 맹독성 독사와 같이
남에게는 치명상을 입히면서도 자기는 문제없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념으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거나
종교적 신념으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거나
정의로 치장하고 무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사랑보다 우선합니다.
자기의 이념이나 종교 신념만이 옳고 자기만 정의롭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은 틀려먹은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이기에 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째가는 계명을 수없이 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이어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정혜결사를 주도했던 보조지눌의 가르침입니다.
“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만든다.”
같은 물을 마시는데도
뱀은 남을 해치는 독을 만들어 내고
소는 남을 살리는 젖을 만들어 냅니다.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을 같이 들어도
뱀과 같은 사람은 그 말로 상대를 해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사랑한다고 할 것입니다.
뱀도 뱀은 사랑하고 자기 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많은 말씀이 들려 옵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 이라고..."
1차 2차로 나누어 공동체 피정을 다녀오곤 하는데
피정 후에 피정의 느낌을 말할 때
좋았다, 나빴다, 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나
또는 신자들이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오늘 신부님의 강론이 좋았다,
또는 그렇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보게 됩니다.
마치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오면서 영화평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그 부류가 아니라고 말 못하죠.
그러나 꼼꼼히 생각해 보면
어느 피정, 어느 강론인들 좋고, 나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이지요.
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밭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들은 후에는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으로 성숙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적 존재임을 망각하고 오만하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마치 하느님인 양 거침없이 비판을 가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얼굴이 지금도 붉어지지요.
마치 책한 권 읽은 사람이 용감한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 이상은 높게!"라는 말처럼
씨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비록 어떤 씨가 떨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
제 마음의 옥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어제 오늘은
왜 이렇게 짙게 다가오는지요!
고맙습니다.
모두가 '소' 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 걱정입니다.
어제저녁 이웃에 형님들과 뒷산을 오르는데
형님들 말씀이 무조건 져주고 입다물고 살아라....
예수님의 구원행위 앞에 인간이 채워가야 할
유일한 준비의 행위는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계명인것을.
나는 거짓 신앙인으로,
또는 거짓 신앙을 쫓지 않는가?
이 아침 묵상해 봅니다.